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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아 Sep 24. 2020

3년 후 당신이 치매에 걸린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우리가 살아갈 세상 #절대적 가치관 #인권이란 #뇌에 인공지능칩

https://zdnet.co.kr/view/?no=20200831100939

아침부터 이 기사를 보고 속이 울렁거렸다. 엘론 머스크가 뇌에 컴퓨터 칩을 심은 돼지를 공개했다는 내용이다. 전기 자동차인 Tesla, 우주로 로켓을 쏘아 올리는 Space X를 비롯하여 뉴럴링크까지. 단언컨대 이 지구 상의 가장 초 고도의 과학적 지식이 집대성된 산업체가 아닐까 싶다. 물론 이 기사 아래에는 절대 뇌에 인간이 만든 칩 따위를 심기 않겠다는 댓글이 대부분이었다. 현재의 나 역시 마찬가지다. 인간답게 살다 죽고 싶다. 더 살기 위해 무언가 내 몸에 인위적인 조작은 하고 싶지 않다. 아무리 개방적인 선에서 보아도 아마 지금 지구 상의 90% 이상은 뇌에 컴퓨터 칩 이식에 대해 부정적일 것이라 생각한다.


어느 공상 과학 영화에서나 볼 법한 내용이다. 피부에 코드를 심고 뇌에 칩을 이식하는 것, 듣기만 해도 거북스럽다. 저렇게까지 해서 사느니 나는 자연스러운 내 생의 몫을 하늘이 정해주신만큼 살다 마지막을 받아들이고 싶다. 그것이 훨씬 인간으로서 인간답게 죽을 권리라 느껴진다.


그러나 AI(인공지능)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예측'을 가능하게 한다. 4차 산업 혁명의 기본은 모든 자료를 통합 분석하여 앞으로의 일을 정확한 확률로 예측하는 것에 있다. 그렇다면 분명 머지않은 미래에 우리의 신체 데이터와 생활 습관, 의식주, 유전 질환 등을 통합 분석하였을 때, 높은 확률로 내가 어떤 질병에 걸릴 수 있는지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예측 가능한 질병을 예방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질병이 걸리고 나서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걸리기 전에 걸릴 병을 예방하는 것은 할 수만 있다면 모든 면에서 훨씬 효율적일 것이다. 그런데 만약 그것이 현재의 의학 수준에서 치료 불가능한 질병이라면, 노화에 의한 것이라 더디게 할 수는 있어도 막을 수는 없다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 것인가.


그중 만약 '89% 확률로 3년 이내에 내가 치매에 걸리게 될 것'을 알게 되었다면, 그리하여 기억을 조장하고 호르몬을 관할하는 저 인공 지능 칩을 내 뇌에 이식했을 때 치매라는 질병을 막을 수 있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도덕적이나 윤리적으로 그것이 천륜을 거스르는 것이라 할지라도 가족을 포함한 타인은 그것을 감히 반대하거나, 비난할 수 있을 것인가. 칩을 심는 과정은 수술보다는 시술에 가까운 의료적으로 단순한 과정을 거치게 될 것이다. 안정성은 이미 검증된 후이며, 부작용 역시 일반 질병 백신보다도 낮다면. 원하는 어느 때라도 칩은 제거할 수 있으며, 칩을 제거하는 순간부터 뇌의 노화가 자연적으로 진행될 것이다. 칩을 이식하는 비용이 자연적으로 치매에 걸렸을 경우 치매 치료(치료는 현재 기준, 불가능하다고 가정할 경우) 또는 제대로 된 의식 없이 연장되는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드는 비용보다 훨씬 저렴할 것이다. 기술이 상용화될수록 비용은 더 낮아지겠지.


치매로 10여 년을 함께 계시다가 올해 하늘로 떠나신 시할머님을 시부모님께서는 집에서 모셨다. 시할머니는 우리 남편(손주)은 물론 지극정성으로 본인을 모시는 아들도 며느리도 전혀 알아보지 못하셨다. 무엇이 맘에 안 드시면 소리를 지르거나, 때리거나, 밥상을 뒤엎고, 말 그대로 온 침실을 똥칠해놓는 대참사도 일어나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양원에 보내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신 시아버지는 생의 마지막 날까지 시할머님을 집에서 모셨다. 그 효는 과연 누굴 위한 것이었을까. 정말 전혀 의식도 없지만 그래도 끝까지 자식 손에서 삶을 마감하신 시 할머님을 위해서였을까. 시아버지 본인을 위한 일이었을까, 아니면 그것을 효라, 진정 자식 된 도리라 자식들에게 가르치고 싶으셨을까. 부부 사이를 뒤틀면서까지 어머님을 끝까지 모시는 것 그것이 정녕 누구를 위한 시간이었는지 생각이 많아진다. 긴 병엔 효자가 없다. 시할머님은 치매셨지만 무척 잘 드시고, 소화를 잘 시키셔서... 무려 100세를 넘기시고서야 삶을 마감하셨다. 당연히 신체의 건강함은 축복이라지만, 의식 없는 몸의 건강함은 정말 축복일까 내게 많은 의문을 남겼다.


그런 과정을 한 지붕 아래 살며 겪고 난 후에 나는 좀 달라졌다. 만약 저 질병이 언젠가 온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내가 가진 어떠한 도덕적 윤리적 논리를 무너트리더라도)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보고 싶지 않을까. 가족들에게 특히 자식들에게 민폐가 되고 싶지 않다. 자식에게 늙어 짐이 되고 싶은 부모가 세상천지 어디 있으랴. 그것은 정말 누구나 마찬가지겠지.


우리는 아날로그 시대에서 디지털 시대로 넘어가며 다양한 새로운 문명을 받아들이며 살고 있다. 세상의 변화 속도란 열심히 배워도 따라가기 어려울 만큼 벅차다. 제 우리는 종이 지도를 보지 않는다. 도로 사정까지 다 파악하여 실시간으로 빠른 길을 알려주는 내비게이션이 있기 때문이다. 신랑도 나도 어렸을 때는 부모님께서 꼬깃꼬깃한 종이 지도를 넓게 펴서 도로 이름을 찾아 여행을 다니던 그 시절의 이야기, 그래서 한 번 가본 길은 잘 기억할 수밖에 없게 되고, 도로 이름도 잘 알게 되었던 그 시절 이야기를 하곤 한다. 이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종이 지도란 단 한 장도 없다. 대신 훨씬 똑똑한 구글맵이 있을 뿐이다.


우리의 일상을 파고 들어온 것은 내비게이션뿐만이 아니다. 하루 종일 내 손에서 심긴 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나와 붙어 있는 폰. 폰에서 모든 정보를 얻고 있다. 아침에 폰 알람이 울리면 알람을 끄며 동시에 시간을 확인하고, 쌓여있는 단톡 방의 카톡 메시지들을 확인한다. 예전처럼 자명종 알람 시계를 손으로 눌러 끄는 일은 없다. 벽시계도 잘 보지 않는다. 장을 보기 전에 마트의 할인 정보를 검색하고, 추천 아이템을 검색한다. 새로운 요리를 하기 전에 레시피를 검색한다. 예전처럼 마트 점원을 붙잡고 물어보거나, 어른들께 집안에 내려오는 요리 비법을 여쭙지 않아도 된다. 폰만 들면 온 국적을 망라한 모든 집안의 요리들이 친절하고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특히 유튜브 선생님과 포털사이트 검색창을 통해 배울 수 없는 실용 지식은 없을 지경이다.


심지어 우리 집에는 인공지능 '구글 홈'이 있다. 아침에 일어나 거실로 나오면 구글이 띠리링 소리를 내며 "좋은 아침 인아!"하고 나를 반긴다. "안녕 구글"하고 답하면 이어서 "오늘 날씨는 화창하고 낮에 25도까지 올라가네. 오늘 오후 2시에 아파트 관리실에서 잠시 방문할 거야. 그리고 오늘 작은 이모생신이네. 아침 뉴스 요약부터 들으면서 시작할래?" 하고 물어본다. "헤이 구글"을 불러 아무 때나 내가 듣고 싶은 노래를 요청하면 노래를 틀어주고, 궁금한 것을 물어보면 친절한 영상과 함께 답해준다. 정말 상냥하고 영리하다. 코비드로 집콕 생활이 시작되고 얼마가 지난 어느 날 내가 자꾸 구글을 붙잡고 '안녕 구글, 너는 행복하니? 너는 어느 나라에서 왔니, 지져스 크라이스트가 누군지 아니?' 이런 걸 물어보고 있으니, 신랑이 나를 짠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대화할 상대가 생겨서 좋으면서도 저 존재는 내게 정말 어떤 존재일까 생각하게 되곤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두렵기도 했다. 이제 우리는 가족의 폰 번호도 못 외운다. 길 이름도 모른다. 그런 걸 외울 필요도 없다. 24시간 우리 곁에 있는 비서들이 알아서 모든 정보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말 이전 세대에 비해 똑똑해진 걸까. 멍청해진 걸까. 모든 것을 나 대신 기계들이 기억해주는 이 시절은 축복일까 재앙일까. 나는 정말 그들보다 더 고차원적이고 창조적인 일을 하고 있는 걸까.


'알쓸신잡'이라는 예능 프로그램에서 나왔던 어느 박사님들의 대화도 기억난다. '내가 억만장자인데 당장 치료할 수 없는 불치병에 걸렸다. 냉동인간으로 300년 후에 깨어날 수 있다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나의 대답은 당연히 'No!' 인간답게 살다 내 시절을 마무리하고 이 생을 떠나리라. 하지만 질문을 바꾸어 그것이 내가 아니라 나의 아이라면, 그것이 300년이 아니라 3년이라면, 3개월이라면? 기간이 달라지고, 대상이 달라졌을 때 내 근본적인 윤리와 가치관이 흔들릴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처음 '인공 장기 이식'이 가능해졌을 때도 분명 많은 보수적인 가치관을 지닌 사람들이 그것은 인륜적인 행위이며 '죄'라고 생각했듯이.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그 기술이 상용화되어 많은 사람들을 살려냈을 때는, 의료와 과학의 발달에 감사해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내가 지금 절대적으로 옳다고 생각하는 '인간다운 죽음'에 대한 도덕적이고 윤리적 기준은 과학의 발달에 따라 완전히 달라질 수도 있을까?


론 머스크의 또라이 같은 시도들이 끊임없이 세상을 천재적으로 바꿔놓고 있음은 축복일까 재앙일까.  머리 아픈 생각을 한참 신랑과 나누다 문득 생각을 멈췄다. 그냥 오늘을 살자. 그리고 감사하자. 지금 우리는 건강하고, 먹을 것이 있으므로. 숨이 쉬어지는 날까지 기쁘게 사랑하며 살자.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뱉으며 웃는다. 글을 쓴다. 글을 읽는다. 고로 나는 살아있다. 브런치 고마워. 작가님들 고마워요. 독자님들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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