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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아 Nov 11. 2020

신라면을 먹다 주저앉아 울어버렸다.

#신라면의 배신 #돌밥 #코로나블루 #향수병

돌밥돌밥(돌아서면 밥 돌아서면 밥) 이제 내가 하는 밥이 너무 지겨웠다. 밥을 하는 것도, 내 밥을 먹는 것도 지겨웠다. 남이 해준 맛있는 밥이 좀 먹고 싶었다. 이곳의 외식은 턱도 없이 비싼데 코비드라 선택의 폭이 넓지도 않고, 맛도 없었다. 그냥 엄청 평범한 한식이 그리웠다. 한상 가득 차려진 엄마 밥까진 바라지도 않는다. 하다 하다 그 지겹던 회사 구내식당 밥과 고등학교 급식이 다 그리워질 줄이야. 누가 일정한 시간에 급식 비용으로 한식을 매끼 차려준다면 정말 감사히 잘 먹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사람이 이렇게 간사하다. 나는 원래 밥도 떡도 된장도 김치도 그렇게 찾는 편이 아니라 미국에 와도 한식이 별로 그리워질 것 같지가 않았다. 요리를 하는 것도 걱정 없었다. 코로나 블루와 돌밥의 지겨움을 성토하는 다른 엄마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도 크게 공감하진 못했다. 내 식구들과 도란도란 밥을 차려먹고 건강하게 자라는 아이들을 보는 것이 매일의 소소한 성취였고 행복이었다. 그렇게 거의 일 년이 다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불현듯 한국에서 먹던 라면이 그리워서 가까운 마트에 파는 라면을 집어왔다. 월마트에서 (그것도 나의 최애템인) 신라면을 살 수 있다니! 감사했다. 아이들과 신랑은 볶음밥을 차려주고, 나는 라면을 끓이려고 물을 올렸다. 뜨끈하고 얼큰한 국물이 마시고 싶었다. 요 며칠 식욕이 통 없었는데, 라면이라면 한 그릇 다 비울 수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라면을 보글보글 끓여서 식탁에 올렸다. 배를 채웠다. 허기를 달랬다고 하는 편이 맞겠다. 한 그릇 뚝딱 비울 수 있을 것만 같았는데 면은 신랑에게 반을 넘기고... 남은 국물을 냄비 채 들고 마셨다. 오랜만에 매콤한 국물이 넘어가서였을까, 목구멍이 알싸하게 화끈거렸다. 그런데 이건, 내가 아는 신라면 국물 맛이 아니었다. 맛이 없었다. 매운 국물은 맞는데, 뭔가 20% 부족한 맛이었다. 내 입맛이 바뀐 걸까. 이상하다. 만족스럽지 않았다. 신라면 봉지를 들어 보니 캘리포니아에 있는 '농심 미국 공장' 주소가 적혀있었다. 아뿔싸, 한국에서 가져온 것이 아니라 미국에서 만든 농심 신라면이구나.


내가 기대했던 라면 맛이 아니었다. 몸도 마음도 달래 지질 않았다. 망연자실 냉장고 문을 멍하니 열고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우유, 치즈, 요거트, 토마토, 계란, 닭고기 식재료가 꽉 채워져 있었지만 손이 가는 것이 없었다. 냉장고 문을 닫고 주저앉았다. 먹고 싶을 때 그 흔한 라면 하나 맛있게 못 먹는다는 사실이 갑자기 서러웠다. 눈물이 고였다. 미국 신라면 맛이 한국 신라면 맛과 다르다고 주저앉아 우는 꼴이 너무 어이가 없었지만,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맛없는 라면이 눈물 날 정도로 슬플 일인가. 아니면 이게 코로나 블루라는 것인가. 머리로는 이렇게까지 서러워할 일이 아니라 생각하면서도 마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허기짐에 펑펑 눈물이 쏟아졌다.


엄마가 해주는 김밥이 먹고 싶었다. 다진 양념 소고기에 단무지와 오이, 어묵과 당근 그리고 두툼한 계란이 들어간 엄마 김밥이 먹고 싶다. 집 앞에 있었던 좁고 허름한 대구 막창집, 시아버지랑 막창에 소주 한 잔이 너무 하고 싶다. 아빠가 자주 데려가 주셨던 육전 냉면집의 고기전 올라간 물 비빔냉면(물 반 비빔반)도 먹고 싶다. 아 그리고 중국집에 그 흔한 짜장면, 짬뽕에 탕수육으로 묶인 세트 A도. 진짜 맛있는 돼지 국밥집에 걸쭉한 들깻가루 국물도, 숨은 지역 맛집이라 딱 끓여낸 한 솥만 팔고 문을 닫는 순이네 추어탕도 먹고 싶었다. 엄마가 정성스레 끓여주시던 육개장도 그립다. 할머니가 만들어주시는 오그락지 무말랭이도. 아 그리고 만만하게 자주 가던 오리 양념 로스구이집도. 동네 성당 앞에 있던 축산 집에 메밀 소바와 소 한 마리도. 지금 시켜주면 혼자 5인분은 먹어치울 수 있을 것만 같다. 저녁 10시만 되면 신랑과 시킬까 말까 고민하던 그 흔한 치킨집도. BHC 뿌링클, 네네치킨 파닭, 교촌치킨, 또래오래, BBQ 황금올리브, 굽네치킨 고추 바사삭 종류별로 다 시켜 먹고 싶다. 쓰레빠 질질 끌고 무릎 나온 츄리닝 입고 4캔 만원 하는 편의점 맥주 사 오던 길도 그립다. 점원 불러서 말할 때, 뭐라고 말하면 좋을지 미리 머릿속에 문장 만들어 보지 않고 그냥 말할 수 있었던 일상이 그립다. 제일 친한 친구, 보고 싶다고 부르면 다음 날이라도 만날 수 있었던 (적어도 시차 계산 없이 통화라도 할 수 있었던) 흔해 빠진 일상이 그립다. 엄마가 반찬을 바리바리 싸주면 됐다고, 다 먹지도 못한다고 사양했던 그 시절이 얼마나 감사한 순간이었는지 그때는 몰랐다.


오늘 신라면이 나를 터트렸다. 저 마음 구석에 잘 꾹꾹 담았던 것이 갑자기 터져 나왔다. "잘한다. 훌륭하다. 잘 살고 있다. 잘하고 있다. 나는 요리도 잘하고, 육아도 잘한다. 미국 생활 즐겁고 감사하다. 안 복잡해서 좋다. 코비드 안 걸리고 건강해서 감사하다. 재밌다. 행복하다." 수없이 내가 나를 달래고 어르고 토닥여왔는데. 오늘 갑자기 미국 신라면이 마음속 깊은 곳의 판도라의 상자 확 열어버렸다. 아 엄마 보고 싶다. 이게 말로만 듣던 코로나 블루인가. 향수병인가. 호르몬의 변화인가. 다 섞여버린 마음의 합병증인가.


다음 주면 결혼기념일이다. 나를 이 머나먼 미국 땅까지 끌어내 이민 살이를 시키고 있는 신랑에게 그 죄를 물어야겠다. 아니 교포를 만나 사랑에 빠진 나를 탓해야 할까. 한국도 이런저런 이유로 살기 어렵다 성화지만, 오늘만큼은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속 편한 남동생이 속절없이 부러워지는 밤이다. 어디 문 연 한국 식당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온 주를(우주 아닙니다.) 뒤져서 순대국밥이라도 한 그릇 사다 먹어야 몸과 마음의 허기가 채워질 것만 같다. 아, 엄마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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