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인아 Oct 02. 2020

시가 살이에서 생긴 첫아기

# 21세기 조선시대 #한 지붕 4대 #양가 첫 손주 #진짜 가족

너는 너의 행복을 위해 최선을 다할 권리가 있다. 시가에서 함께 살 길 원해서 한 집에 들어와 시누와 시동생 심지어 시할머니까지 4대가 한 지붕 아래 살게 되었다. 축하한다. 이것이 1차 네가 셀프로 네 눈을 찌르고 선택한 새로운 가족이다. 너는 이제 21세기의 조선시대를 체험하게 되었다. 자 제발 정신을 똑바로 차리렴. '진짜 가족이 되려면 살 비비고 함께 사는 기간이 있어야 한다.'는 허울 좋은 미명 하에 들어갔지만, 그러한 순 기능에 따르기 위해서는 모두 함께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두가 힘들어질 예정이란다.


 1. 현관문이 있지만 방문과 다름없는 문

불행 중 다행으로 기숙사 같은 구조에 우리 집 문은 내가 잠글 수 있는 구조라지만 말이다. 아무 때나 비밀번호를 꾹꾹 누르고 들어와 냉장고에서 먹을 것을 꺼내가는 식구가 있는 한 그 문이 정말 현관문 역할을 하는지 과연 의문이 들 것이다. 한 건물 안에 새로운 가족들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정말이지 쉬운 일이 아니란다. 신랑 말대로 독립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독립이 아니다. "몸이 함께 있더라도 정신이 독립을 하면 그것은 독립이고, 몸이 떨어져 있더라도 정신이 의존해 있으면 그것은 독립이 아니다."라는 말인지 방귀인지 모를 것에 설득당하다니. 너란 사람도 참 모지라도 한참 모지랐다. 사실 저 말 자체는 참말로 맞는 말이다. 하지만, 단언컨대 너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가 아무리 우리 부부의 독립을 위해 마음을 다져 먹었다 할지라도. 그것이 그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님을 알았어야만 했다.


그러므로 예상했겠지만, 너는 너의 집이 불편하다. 말이 신혼집이지 아무 곳에서도 네 한 몸 편히 눕히지 못한다. 혼수로 해 온 원룸 한 칸 방의 침대에서도 전혀 심리적 안정을 느끼지 못한다. 당연히 퇴근을 해서도 집에 신랑이 없으면 집으로 들어가기 싫을 것이다. 우연을 가장한 동시 퇴근도 몇 번이지... 차에서 알람을 맞춰놓고 잠들었다 깨는 일상이 몸에 벨 것이다. 임신 초기라 잠이 쏟아질 예정이므로. 


 2. 아직 꼬마곰젤리 일지라도 이 집안사람

시부모님께 임신 사실을 알린다. 시모는 눈가가 촉촉해질 정도로 기뻐해 주신다. 시부는 그날도 당장 금연을 시작하실 정도로 첫 손주에 대한 애정 넘치신다. 그리고 바로 너의 무릎에 두꺼운 책을 하나 올려놓을 것이다. 바로 안동 권 씨의 족보 책자다. 몇 대 손이니 무슨 돌림자를 써야 하는지 알려주신다. 물론 돌림자는 아들만 쓴다. 반감이 가득 생긴다. 쓰지 않겠다 하극상부터 부려보려다 조용히 혼자 입을 막는다. 뱃속의 아기가 딸이면 어쩌나 걱정부터 된다. 이런 걱정을 하게 될 것이라 결혼 전에는 아니 임신 사실을 알리기 전까지는 상상도 못 했다. 임신을 알기도 전부터 태몽을 꾸었다며 난리인 총각인 도련님의 눈치 없음도 얄미웠지만, 그 와중에 더 늦지 않게 임신이 되어서 참 다행이라 생각했다. 이 아기는 '허니문 베이비' 정말 이보다 빠를 수 없는 아기가 생겼는데도 하마터면 눈치를 볼 뻔했다. 결혼 후 1년은 신혼을 즐기고 싶었던 꿈은 스스로 무너뜨렸다. 하지만 아기는 귀하고 소중하니 함부로 생명에 대해 말을 하고 싶지는 않다.


 3. 해외 태교 여행은 너무나 위험한 것

임신 전부터 신랑과 함께 휴가를 맞춰 가려고 예매해놓았던 비행기 표를 찢어야 했다. 눈물이 주르륵 흐르겠지만, 그래도 넌 아기를 위해 오래 울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야심 차게 동성 친구와 함께 떠나는 태교여행 비행기 티켓을 예매한다. 위안을 얻았다. 그리고 신이 났다. 여행에 임박하여 시가에 여행 사실을 알린다. 당연히 난리가 난다. 절대 절대로 안된다 할 일이다. 신랑이 같이 가도 모자랄 판에 혼자서 동성 친구와 해외여행이라니 철이 어떻게 그렇게 없을 수 있느냐며 온갖 모진 말을 다 듣고 방으로 돌아와 엉엉 운다. 이번엔 뱃속 아기에게 미안하지만 눈물이 멈춰지질 않는다. 화가 제어가 되질 않는다. 칼춤을 추듯 칼을 들고 방 안을 빙글빙글 돌아본다. 화가 가시질 않는다. 칼을 들고 눈에 보이는 택배 박스를 찔렀다. 푹 푹 푹 박스를 찌르고 오리고 마지막에 칼을 벽으로 집어던졌다. 정신을 차려보니 손이 피범벅이다. 칼을 너무 세게 쥐어서 손이 베였나 보다. 감정 조절이 되지 않아 이 험한 꼴을 겪게 해 뱃속 아기에게 미안해진다. 이후 조용히 여행을 취소했고, 친구 몫의 비행기 티켓과 여행 수수료까지 물어줘야 했다. 이때 스스로에게 고백한다, 나 정신이 괜찮지 않은 것 같아. 


 4. 산부인과는 시아버지가 정해주신 곳으로 

임신 사실을 알자마자 시아버지는 산부인과 세 곳을 추천하신다. 모두 '자연주의 출산' 전문 병원이다. 아이를 위해 무통 주사를 맞지 않고, 모유 수유를 적극적으로 권하며, 출산 후 당연히 모자동실을 한다. 조리원은 상술이라며 가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나는 또 내 눈을 내 손으로 찌르는 선택을 한다. 아이에게 좋은 것이 내게도 좋은 것이니 나는 기꺼이 자연주의 출산을 택할 것이다. 시모까지 함께 병원 투어를 가고 싶어 했지만... 아직 너무 초기라 질로 초음파 검사를 해야 하는 그때에 함께 산부인과를 가야 하는 것이 마음이 불편했다. 다행히 남편이 스케줄을 핑계로 막아주었다. 휴 다행이다.


 5. 아파 죽을 것 같아도 약은 먹을 수 없노라

그렇게 나의 첫 아이 임신 기간은 시작되었다. 나는 이제 아파 죽을 것 같이 고열이 나도 진통제를 먹을 수 없다. 모든 의약품은 아이에게 안 좋을 것이라는 시가의 잘못된 믿음 덕분이다. 시모는 양약을 극도로 싫어하신다. 사실은 타이레놀 한 알 먹는 것이 고열로 시달리는 것보다 훨씬 아이에게도 안전하다. 그런 산부인과 의사의 말을 전하면 시모는 '그 의사가 네 아기를 평생 책임질 거냐, 그 말을 어떻게 믿느냐.' 성화셨다. 그러면 의료적 지식이 없는 시모 말은 어떻게 믿어야 할까. 허허 화가 났다. 또 칼을 집어 들지는 않았지만 방에 앉아 열이 펄펄 나는데 많이도 울었다. 열이 아이에게 위험하다는데... 열이 나는데 어쩌지... 아가 미안해. 엄마가 미안해. 배를 끌어안고 아기가 잘못 되질 않길 빌며 울었다. 그 미련한 나를 보다 못한 신랑이 왜 잘못된 말을 듣냐며 약을 먹으라 성화였다. 그래 그 말이 맞다. 약을 먹었다. 열이 떨어졌다. 아들은 화를 내며 시모에게 약을 먹었다고 말했다. 아기가 어떻게 되면 어쩔 거냐며 감당할 수 없이 내게 화를 내셨다. 어떻게 그렇게 아기를 가지고도 철 없이 행동하느냐며 정말 너는 머릿속에 아무 생각이 없다며 소리를 질러댔다. 그 화가, 그 악담이 고스란히 내 배를 찌르는 것 같았다.


축하한다. 너의 임신 기간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앞으로 더 찬란한 9개월을 버텨야 한다. 힘내렴. 그래도 생명은 귀하니까, 열심히 지켜낼 의무가 있단다. 그런데 말이야, 다 지나고 보니까 내가 어리석었다. 그래서 결혼 전의 너에게 미리 이야기해주고 싶다. 시가 식구가 불편하면 그냥 현관문을 열어주지 말아라. 잠시 좀 서운하실지 몰라도 잠시 뿐이다. 중요하지 않다. 부부가 옳다고 믿는 것을 해도 아무 문제없다. 알려라. 아무 때나 노크하고 들어오시지 말라고 말씀드려도 괜찮다. 


 '태교 여행'도 위험할 것 같으면 네가 내 손으로 안 갔을 것 같은데, 그게 뭐라고 그리 기싸움을 벌이고, 이기지 못한 싸움에 혼자 상처 입었는지 모르겠다. 그냥 온전히 '부부'가 선택해도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네. 산부인과를 정하는 것도 그래. 사실 시아버지가 산부인과를 알아봐 주시는 것이 얼마나 큰 관심이고 애정이야. 그러니까 그것을 반드시 '따라야'하는 것이 아니라, 그 따스한 마음 써주심에 감사하고 그다음에 '부부'가 주체가 되어 모든 결정을 하면 된단다. 약은 의사의 말에 따라 복용해야 할 때 하고,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은 말하지 않는 여우 같은 지혜를 발휘해보렴. 시어머니는 오직 너와 아가의 건강을 생각하다 보니 그저 안 좋은 약 먹지 않고 스스로 이겨낼 수 있길, 동양의학을 믿고 싶어 하실 뿐이니까. 나와 다른 의견은 다른 의견으로 두고, 그 마음 써주시는 감사함을 읽고, 그다음엔 따르지 않아도 괜찮다. 족보도 그래. 그냥 가족으로 태아를 반겨주시는 부모님의 방식이 서툴고 요즘 세대에 안 맞을 수 있지만, 그 마음 뿌리만 보고 방식을 마음에 담아 두지 않으면 좋겠다. 아들도 딸도, 양가 첫 손이라 얼마나 귀하게 여기실지 지금의 너는 모를 거야. 


그러니 괜찮다. 그들이 뭐라든 별로 중요치 않다. 중요한 것은 너의 건강과 뱃속 아이의 건강과 새로 생겨난 이 가족의 행복이다. 그러니, 제발 너무 귀 기울여 듣지 말아라. 화를 내시거든 풀어지실 때까지 거리를 조금 두렴. 친정에 가있든지, 여의치 않으면 신랑에게 도움을 청하렴.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 결국 풀어지실 거야. 그러니 괜찮다. 너희 부부의 건강과 행복이 결국 부모님의 행복이다. 그러니 소소한 것에 너무 의미를 두지 말아라.

작가의 이전글 결혼 전의 나에게 해주고 싶은 세 가지 현실 조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