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인아 Dec 10. 2020

사라질 것들에 대한 애착

#도시 재개발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내가 태어나 유년기 시절 뛰놀던 아파트는 내 나이보다도 나이가 많다. 최근까지 살다 온 주택가 역시 최소 50년 이상 그 자리를 지킨 주택이 대부분이다. 얼핏 보면 슬럼가 같기도 하다. 호화로운 초고층 빌딩과 더 높은 주상복합 아파트 사이에서 위화감을 뿜어내며 슬레이트 지붕을 이고 그 자리에 서있다. 하지만 돌아보면 이 집들은 딱히 잘못이 없다. 그저 처음 생겼던 그 한결같은 모습으로 그 자리에서 그간 지나온 시절을 증명하고 있을 뿐이다. 잘나지 못해 새로 생긴 건물들과 어울리지 못하자 이제 허울 좋은 '재개발 지역'으로 선정되고 말았다. 지나가는 누군가는 이 지저분한 곳을 얼른 싹 다 밀어버려야 한다고 했고, 그곳의 누군가는 억울하게 삶의 터전을 빼앗겨 소리 없는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도시의 재개발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개인적 의견을 남기는 것은 참으로 조심스럽다. 섣불리 사회적인 관점에서 날 흑백 한쪽으로 몰아갈 사람들이 두렵기 때문이다. 단언컨대 어떠한 정치적 경제적 의견을 피력하고자 재개발 도시에 대한 단상을 글로 사진으로 남겨두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저 난 도시의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색색의 아름드리 단풍이 이 재개발에 경제적인 수치로 환산되어 보상받았다면 과연 얼마로 계산되었을까. 저 나무가 줄 수 있는 환경적 순기능 이외에도 지나가는 행인이 얻는 정서적 위안과 마당을 뛰놀던 아이들이 느낄 시각적 다채로움까지 돈에 담아냈을까. 마당 한편에 자리한 단풍나무를 보며 담아왔을 그 시절의 꿈과 추억과 눈물은 어떻게 계산되었을까. 그래서 그건 얼마였을까. 


붉은 벽돌 담장을 넘어 물끄러미 켜켜이 쌓인 지난 세월들을 유추해본다. 사오십을 훌쩍 넘어 사람 나이로 세어도 벌써 중년이 넘었을 이 곳. 이곳에서 뛰놀던 어린이들은 이제 영원히 다시 추억의 공간으로 돌아올 수 없으리라. 그래도 예전에는 집집마다 허락되는 여유공간이 있어 곳곳이 나무와 화단과 숨 쉴 수 있는 여백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공간을 메워야 한다고 말한다. 어떤 여유도 공간도, 돈으로 환산될 수만 있다면 바꿔야만 한다. 한 가정이 가질 수 있는 유휴공간을 좁히면 좁힐수록 누군가의 손에 쥐어지는 돈은 많아질 테지. 추억도 공간의 여백도 돈보다 우선하는 가치일 수 없다고 세상이 강요한다. 


유럽의 오래된 마을을 돌아보며 다양하고 아름다운 건물들이 참 많다고 생각했었다. 그건 건물들이 새 것이어서 또는 화려하거나 놀라운 기술들로 도배되어 있어서가 아니었다. 오래된 방식의 건물 구조였지만 수 세기를 넘어가는 그 건물 양식을 그대로 지켜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낡았지만 사람의 손길이 구석구석 닿은 자국들은 그것 그대로 각자의 이야기를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었다. 


이 곳에도 그런 이야기가 반세기쯤은 서려있는 것 같은데... 이제 우리는 저것들을 다 밀어내고 새것으로 다시 지어야 한다고 말한다. 낡고 지저분해서 못 쓴다고 한다. 재개발 시행 후 누군가는 이주 기간 압박에 못 이겨 황급히 터전을 옮겨야만 했겠지. 자식들 손으로 넘어갈 조합원으로서의 권리를 두고 어떻게 '나 사는 동안만이라도 이 집을 그대로 두고 싶다.'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 당장 갈 곳도 없지만, 우리 애들은 그래도 더 살기 나아질 거란 위안을 하며 어디로든 세를 얻어 나가 본다. 나아지겠지. 지금보다 나아지겠지. 


"엄마 이제 그만 좀 해요. 된장 간장이 요새 얼마나 잘 나오는데, 사다 먹는 게 훨씬 편하고 싸요. 저것들을 아파트에 들고 들어가면 어디다 놓으라고요. 허리도 아프시다면서. 병원비가 더 나가요." 속 모르는 모진 자식들 구박에 들고 가지도 못하고 저리 휑뎅그렁하게 남겨져 버렸겠지. 그간 마당의 따스한 햇볕 아래 정성껏 장과 지를 담가내며 가족들을 살뜰히 먹였을 것이다. 저 장독들을 보고 있자니 곧 사라져 버릴 구구절절 살아온 이야기들이 애절히 날 붙잡는 것만 같아 차마 발길이 떨어지질 않았다. 


식물과 동물을 아끼는 사람은 분명 심성 고운 사람이라 배웠다. 이제까지 그는 좋은 주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터전에 내 몸 하나 뉘이기 힘든 좁은 공간으로 가야 한다면, 주어진 이주 기간 3개월 안에 어떻게든 세를 얻어 나가야 한다면. 어쩔 수 없었으리라. 

"두고 가버려야 할 화분이 그렇게 처량했다. 함께 지낸 세월이 얼마인데 데려갈 재간이 없다. 저것들이 꼭 쓸모를 다 한 내 모양 같아서 서글퍼졌다. 꼭 필요한 것만 챙겨도 이미 짐은 산더미 같았다. 지난 세월에 대한 예의로 그냥 두었다. 이제 막 꽃대를 올리기 시작한 귀한 그 생명들을 쓰레기 봉지에 쓸어 담지 않는 것으로 마음의 위안을 삼아야 했다. 누군가 화분이 아까워서라도 저들을 데려가 키워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은 채 고개를 돌려야만 했다." 


마치 타이타닉에서 배가 기울어져 수면에 가라앉을 때까지 갑판에서 음악을 연주하던 악사들이 기억났다. 끝까지, 생의 마지막까지 해오던 제 일을 묵묵히 해내는 것, 그것이 저들의 마지막 몫 이리라. 그저 그렇게 덤덤히 꽃대를 올리고 생의 마지막 꽃을 피워 올리겠지.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 낡은 우편함 따위는 어쩌면. 이젠 정말 아무에게도, 아무 의미도 없는 장소일지 모른다. 언젠가는 누군가의 애틋한 연애편지를, 또 언젠가는 군에서 온 아들의 절절한 편지를 담아냈겠지. 어쩌면 막내의 반가운 대학 합격 소식도 우편으로 받아오았을지 모른다. 적어도 오십 년은 족히 저 자리를 지켰을 것이다. 때론 눈 비를 뚫고,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누군가의 소식을 전하러 달려와 이 포근한 목적지에 안착했을 테지. 얼굴까지 훤히 보이는 전화가 지금처럼 손쉽게, 이메일이 클릭 한 번에 목적지에 도착하는 이런 별천지 세상에 다다르기 전에는 말이다. 이 작지만 안전한 이곳 우편함에 기쁨도 슬픔도 놀라움도 또 너에 대한 나의 온기도 고스란히 종이 위에 꾹꾹 눌려 담아 전해졌을 것이다.


이발관. 이발소. [명사] 일정한 시설을 갖추고 주로 남자의 머리털을 깎아 다듬어 주는 곳.

음악원 [명사] 전문적으로 음악을 가르치는 기관.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다. 누구 하나 공감하지 못한다 해도 할 수 없다. 재개발 반대 분자 인양 날 누군가 손가락질한다면 그것조차 어쩔 수 없다. 나는 재개발 조합장 차가 무슨 외제 차로 바뀌었다더라 그런 가십엔 관심 없다. 온갖 얽히고설킨 이해관계, 알고 싶지도 않다. 다만 매일신문과 뉴스에서 떠드는 재개발이라는 것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고 나니 그저 가슴 한 구석이 답답해졌을 뿐이다. 사십 년 넘게 한 곳에서 장사를 하시던 할머니 돼지 국밥집이, 이발소가, 음악원이 왜 하루아침에 철거되어 나가야만 하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진정 누구를 위한 일인지 묻고 싶다. 그래서 정말 실거주자인 그들의 삶이 정말 나아졌는지 묻는다면 피식 웃고 싶다.


그리고 그저 근본적인 것이 궁금했다. 왜 낡은 것은 다 무너뜨려 다시 지어야만 하는 걸까. 어째서 곱게 피어 올린 화단의 꽃도, 저 아름드리나무도 잘 드리워진 벽의 담쟁이넝쿨도 다 엎어버리고 그 위에 다 똑같이 생긴 아파트를 높이, 더 높이 지어 올려야만 하는 건지. 이 좁은 땅 위에서 왜 우리는 좁게 더 좁게 살아야만 하는 건가.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의 아름다움을 기록하고 싶었다. 누군가는 이렇게라도 기억하고 있다고. 눈 앞에서 허무하게 사라져 버릴 이 서글픈 아름다움을 함께 위로하고 싶었다. 조용히 다가가 손 잡아 주고 싶었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것이 오랜 시간 수많은 사람 사는 이야기를 품어온 이 공간에 대한 예의일 것만 같았다. 그래서 동네를 돌며 정신없이 카메라의 셔터를 눌러댔고, 또 이렇게 대책 없이 글을 써 내려간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매거진의 이전글 빚 없이 빛나게 살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