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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아 Dec 17. 2020

전화 한 통 거는데 1년이 걸렸다.

#사라질 사람들에 대한 애착 #다시 뵐 수 있을까

공항으로 가는 차 안, 동트기 전 한강의 야경을 보며 인천으로 향했다. 올림픽대로에 차는 많지 않았다. 사촌 오빠는 일부러 그 시간에 깨어 전화를 했다. "조심히 가고, 잘 지내. 오빠가 얼른 한 번 갈게." 한다. "응 오빠. 가족들 잘 부탁해." 하다 말고 목이 메고 만다. 길게 숨을 들이쉬고 하려 했던 말을 삼킨다. 전화를 끊었다. 그것이 한국에서의 마지막 통화였던 것 같다. 지금이 무슨 60년대도 아니고. 한 번 이민 가면 다시 못 올 것도 아니었다. 불법 체류도 아니라 오가는 것엔 신분상의 문제도 없었다. 하지만 둘 다 알고 있었다. 이 길이 어쩌면 내가 결혼해서 서울로 시집가던 날 눈물 글썽이며 아쉬워하던 일보다 한참은 더 멀어질 일이라는 것을. 그리고 문맥상 쓰인 '가족들'이란 실상 '할머니'라는 것을. 품에 안긴 아이들은 다시 잠이 들었다. 차 창밖 풍경이 빠르게 스친다. 상념 속에 모든 것이 동화 같았던 아릿한 유년기와 학창 시절을 지난다. 비행기에 오르는 마지막 순간까지 내 마음을 잡아끌던 사람, 우리 할머니.


큰아버지는 사촌 언니 중학교 입학식도 못 보고 돌아가셨다. 사람이 완벽하면 하늘에서도 필요해서 빨리 부른다 했던가. 아무튼 그런 말이 생각나는 어른이었다. 큰 아버지는 그 옛날 피난 시절 할머니 손을 잡고 한강을 건너셨다. 그리고 숨어든 그 시골 촌구석에서도 영재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했다. 서울로 올라가 아주 이른 나이에 고시 준비를 하실 만큼 영특하셨단다. 할머니의 맏아들 사랑이 유별나서일 수도 있지만, 인물도 훤하고 성품도 훌륭하고 어릴 때부터 특출 나게 영리했었다는 이야기를 익히 할머니께 들어왔다. 하지만 그 완벽하고 든든했던 큰아버지는 언니 오빠가 채 사춘기를 시작하기도 전에 일찍, 너무 일찍 하늘로 불려 가 버리셨다. 할머니는 먼저 간 자식을 가슴에 묻으셨지만, 그 절절했던 애정은 맏 손주인 사촌 오빠에게로 향했다. 너무 일찍 아버지를 여읜 갓 고등학교에 들어간 오빠는 그렇게 가장이 되었다. 오빠와의 통화 끝에 결국 목이 메인 것은 마지막 시골 할머니 댁을 떠날 때 할머니 모습이 눈에 아릿하게 남아서였다. 할머니는 떠나기 전 그 거칠고 작은 손으로 말없이 내 두 손을 꼭 잡으셨었다.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고 또 흔들어주시던 할머니.


이 곳 시간 새벽 2시, 세상이 잠든 고요한 시간에 폰을 들고 빈 방으로 들어간다. 할머니는 재작년에 아흔을 넘으셨다. 스마트 폰은 볼 줄 모르셔서 아직도 집 전화기만 쓰신다. 그래서 카카오톡으로 손쉽게 전화는 드릴 수가 없다. 국제전화 앱을 깔아 카드 번호를 넣고 선불로 결재를 한다. 그래야 일반 전화를 쓸 수 있다. 사실 할머니 말고는 일반 전화로 한국에 전화 걸 일이 거의 없어 미루고 미뤘던 참이다. 할머니가 최근에 자꾸 아프시다는 이야기를 아빠한테 전해 듣고 전화를 더 미룰 수 없었다.


뚜루루. 뚜루루루. 신호음이 간다.

달칵. (기운 없는 할머니 목소리.) 여보세요~

할머니, 저예요.


여보세요, 누구요오?

(아 맞다. 할머니는 귀가 잘 안 들리신다. 큰 소리로 다시)

할머니, 저예요. 저 인아예요.


(순간 할머니 목소리가 반가움으로 가볍게 떨려온다.)

아이고야~ 니 어디고? 미국이라?

네네 미국이에요.

거기서 어떻게 전화를 했노?


할머니, 너무 오랜만에 연락드리죠. 요새 자꾸 아프시다면서요.

응 아니다. 괜찮아. 나이 들면 다 그렇지. 기운이 있다 없다 해.


알라들 잘 크고?

네 할머니. 애기들은 잘 커요.


권서방은 잘 있고?

네 잘 있어요. 일 열심히 하고 있어요.


그래그래 애쓴다. 마카 니도 몸조심하고 어디 댕기지 마라.

네 할머니도요. 할머니도 요새 난리라니 더 조심하셔야 돼요. 따뜻하게 계시고요.


그래그래. 인아, 기도할게. 할머니가 기도할게. 할머니가 마카 매일 기도한다.

할머니, 감사해요. 기도 덕분에 저희가 잘 살아요. 계속 기도해주세요. 할머니 저도 기도할게요.


건강 조심하시고요. 할머니.

오야 그래. 전화비 마이 나간다. 어여 드가라. 잘 살아래이.


별 것 없는 대화지만 전화를 끊고, 오열을 하고 말았다. 아니 이게 뭐라고 안부 전화 한 통 드리는데 장장 1년이 걸렸다. 진작 더 자주 전화 좀 드릴걸. 할머니는 내가 미국 가던 날, '내가 이제 죽기 전에 다시 언제 너를 볼 수 있을까.' 생각하다 전화 끊고 한참을 우셨더랬다. 할머니의 목소리가 떨려오고 잠겨오는 것을 듣고 있기가 어려웠다. 할머니께는 "에이 할머니, 옛날 같지 않아요. 금방 다시 오지 왜 못 오겠어요. 가까워요 이제. 진짜 금방이에요." 호언장담을 해놓고. 그깟 전화 한 통 드리는데 1년이 걸렸다니. 사는 게 바빠서, 애들 키우느라 정신이 없어서, 시차가 안 맞아서 핑계도 많다. 참 나쁘다.


할머니 계신 그 시골집은 동란에 남쪽으로 피난 와서 자리 잡으신 그 자리 그대로다. 아빠가 우리 애들만 할 때 뛰노셨다는 들판도 여즉 그대로다. 그 자리에서 한결같은 모습으로 자식들을 기다리는 부모의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매일 머나먼 타국에 나가 있는 손녀를 위해 기도를 올리는 할머니의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아무리 생각하고, 보답해보려 하지만 갚을 길이 없다. 이래서 내리사랑이라 하는 것이겠지. 먼 길을 떠나오면서 가장 아팠던 부분이었다. 어쩌면 살아생전에 다시 못 뵐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하는 것. 물론 사람이 가는데 순서가 없다고 누가 언제 어떻게 떠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라지만. 어쩌면 명백히 삶의 기한이 길게 남지 않은 할머니 앞에서, 이제 거의 못 올 먼 길을 떠나겠다 고하는 것이 얼마만큼의 불효인 걸까. 최소한 설 날, 추석, 할머니 생신, 할아버지 기일 분기별로 한 번은 꼭 전화를 드려야겠다. 안부 전화드리는데 걸린 1년이라는 시간이 묵직하게 마음을 눌러왔다. 오늘도 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서서히 저물어가는 할머니를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feat. 윤동주 '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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