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할 줄 모르는 남자 #밸런타인엔 쌍화탕 #크리스마스엔?
선물을 할 줄 모르는 남자와 함께 산다. 그는 장점이 많은 사람이다. (원래 공개적인 곳에서 흉을 보기 전엔 밑밥을 깔아야 마음이 편하다.) 다정하고 성실하고 착하고 부지런하며 지혜롭고 배려 깊고 속도 깊고 따뜻하고 참을성이 많고 합리적이며 매력적인 사람이다. 하지만 연애 때부터 꾸준히 못하는 것이 한 가지 있다면 바로 선물을 할 줄 모른다는 것! 이기적인 마음에서 나눌 줄 몰라서가 아니라, 대상에게 적당한 어떤 것을 찾아 적당한 가격에 구매하여 필요한 시기에 센스 있게 전하는 것을 할 줄 모른다. 결혼 후에 시댁 식구들을 보니 다 선물을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그는 가족 사이에 선물을 주고받는 문화가 없다고 했다. 필요할 때 계산을 해준다거나, 누가 어려우면 돈으로 돕는 건 오히려 잘한다. 그냥 살면서 필요한 물건을 필요할 때 사준다. 좋게 말해 일 년 365일 부족함이 없다. 하지만 같은 의미로, 어떤 특별한 날에도 필요한 것 이상의 넘침도 없다. 그래서 정말 상대를 놀라게 할 로맨틱한 생일 또는 기념일 선물이라는 것은 죽어다 깨어나도 할 줄 모른다. 하지만 진심을 가득 담아 편지는 잘 써준다. 내가 사고 싶다고 하는 것에 단 한 번도 이의를 제기한 적이 없다. 물론 나도 아직 고가의 물건을 나를 위해 사본 적이 없기도 하지만.
연애를 시작하고 우리의 첫 밸런타인 데이가 찾아왔다. 처음 썸에서 연인이 되고, 손은 언제 잡아주려나 긴장과 설렘 속에 달콤함이 넘쳐흐르는 밸런타인이었다. 두근두근 설레는 마음으로 그가 건넨 종이 가방을 받아 들었다. 그는 재미교포다. 뭔가 미국인들은 밸런타인도 크리스마스도 화려하고, 과하게 축하하며 보내던데... 어떤 달콤한 초콜릿일까? 길리안? 로이스? 고디바?? 왠지 평소에는 잘 못 사 먹는 어떤 고오~급진 초콜릿을 상상하며 종이 가방을 조심스레 열었다. 두둥! 종이 가방 안에는 약국에서 구입한 쏠라씨(비타민 캔디) 한 박스와 쌍화탕이 들어있었다. 하하,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시기였다. 날씨가 추우니 감기에 걸리지 말라며 내 손에 쥐어 준 그의 선물을 목으로 넘기며 새콤달콤 + 씁쓸한 것이 참 기분이 묘했다. 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속이 훈훈하게 건강해지는 기분이랄까. 그리고 참 그 다운 선물이라 생각했다. 그는 선물에 있어서는 교포가 아니라 내가 늘 보고 자란 토종 경상도 남자에 가까웠다. 약국에서 쌍화탕과 쏠라씨(비타민 캔디) 한 박스를 들고 왔던 그는 같이 살아도 참 변함이 없었다. 늘 그의 머릿속에서 나왔을 법한 무언가를 선물하곤 했다.
사람이 어떻게 모든 것을 잘할 수 있을까. 나도 단점이 많은 사람이고, 그런 부족한 부분을 그가 잘 채워주듯이 나도 그의 부족함이 티 나지 않도록 잘 채웠다. 결혼 후 양가 부모님과 형제들을 챙기는 것도 나의 몫이었고 그는 그런 나의 섬세함에 넘치도록 감사를 표했다. 우리 가족이 만나는 다른 사람이나 가족들을 챙기는 것은 내가 채울 수 있었지만, 문제는 늘 내 생일과 우리의 결혼기념일이었다. 그는 그래도 고민을 많이 했다. 자신의 부족함을 어떻게든 채우기 위하여 안절부절못하며 무언가를 준비했다. 그리고 그 무언가라는 것은 무척 현실적인 것이었다. 예를 들면, 싱크대 위의 구멍 난 고무장갑을 새로 바꿔준다던가! 아니면 당장 써야 되는 프린터기라거나... 때론 치과에서 추천받은 워터픽(물 치실) 같은 기계류가 기념일에 맞춰 집에 도착하곤 했다. 얼마나 실용적인지, 정말 없으면 안 되는 것들을 결혼기념일이나 생일 선물로 주고는 하였다.
하지만 선물은 때론 '필요한 물건'을 사는 것이기보다는 필요하진 않지만 갖고 싶은 '원하는 물건'을 대신 사주는 일이 아니던가. 갖고는 싶지만 내가 내 돈 주고 사기 아까운 어떤 아이템을 받았을 때 훨씬 설레지 않는가. 물론 필요한 물건을 받으면 감사하지만, 선물로 안 받아도 어차피 우리 생활비로 샀을 물건을 선물로 받아 들었을 때는, 무언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쉬움이 남곤 했다.
그래서 선물을 받아 들면 고마움보다는 그 물건의 실용적임에 깔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연애와 결혼 통틀어 단 한 번도 그는 내게 꽃을 선물한 적이 없다. 정말 로맨틱의 'ㄹ'도 그의 머릿속엔 없는 모양이다.
이제 같이 살다 보니 그의 실용적인 면이 참 좋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그는 내 남자 친구에서 우리 아이들의 아빠가 되었고, 크리스마스에는 산타가 되어야 했다! 아이들도 당연히 원하는 선물이라는 것이 있다. 그런데 역시나 그가 고르는 아이들의 크리스마스 선물이란,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 육아 아이템들이었다. 기저귀를 차는 우리 둘째가 아무리 매일 쓰는 용품이라 해도 기저귀를 선물로 받고 기뻐할 리가 없지 않은가! 나라면 내가 올해 얼마나 못 살았길래 산타가 나한테 기저귀를 선물로 줬을까 고민할 것만 같다. 그래서 역시 아이들 선물을 고르는 것도 산타 엄마의 몫이다.
그런 그가 이번 크리스마스에 내 손을 잡고 다짜고짜 베스트바이(한국의 하이마트 같은 전자제품 파는 곳)에 갔다. 일 년을 열심히 살았으니 꼭 산타한테 선물을 받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했으니 언제 어디서든 글을 편하게 쓸 수 있도록 가벼운 랩탑을 사줘야겠다고 말했다. 뭔가 아직 브런치를 통해 수익을 낸 적 없는 나는 부담스러웠다. 이걸 받을 자격이 없다고 느껴졌다. 그래서 거절했다. 나중에 글로 돈을 벌면 그때 사겠다고 하자, 그는 일단 사 줄 테니 더 열심히 쓰라고 했다. 온 김에 가게 안을 둘러보니 격세지감이 느껴졌다. 랩탑들이 얼마나 얇고 가벼운데 성능은 좋은지... 그중 한 구석에 전시된 '삼성 갤럭시 북'이라는 제품이 심플하게 너무 예뻐 보여 만지작만지작 하다 내려놓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충동구매 같았다. 집에 있는 해묵은 랩탑은 크고 무겁고 못생겼지만 그 정도면 글 쓰는 데엔 성능이 충분했다. (사실 브런치는 플랫폼이 잘 되어 있어서 폰으로도 얼마든지 쓸 수 있지 않은가.) 나는 조금 더 고민해보겠다고 했다. 그럼 고민해보라며 우리는 차에 올라탔다. 집으로 돌아가는 줄 알았는데, 한 바퀴 드라이브를 한 후 다시 가게에 멈춰서 (그 사이에 언제? 앱으로 내가 만지다 내려놓은 그놈을 결제를 했는지) 주차장에서 바로 물건을 픽업하는 시스템을 이용하여 랩탑 박스를 내 무릎 위에 올려주었다.
로맨스라고는 없는 그의 나름 '서프라이즈' 방식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그는 나에게 조곤조곤 말했다. 나는 이미 너무 중요한 일을 하고 있고, 충분히 고가의 선물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말했다. 미리 사서 짠하고 깜짝 선물을 해주면 더 좋았을 텐데 자기가 그런 걸 잘 못한다면서. 매일 자기를 돌봐주고, 아이들을 키우고, 글을 쓰고 하는 모든 일이 돈으로 계산할 수 없을 만큼 가치 있는 일이라고. 돈으로 계산해도 자기보다 훨씬 더 많이 벌고 있고, 그래서 자기도 더 열심히 일 할 수 있는 것이라고. 그러니 아이들 앞에서 나중에 돈 벌면 사겠다 그런 말은 하지 말아 달라고. 세상에서 가장 멋진 와이프이자 훌륭한 엄마가 되어 주어서 고맙다고.
랩탑 박스를 끌어안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주룩주룩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프러포즈를 받던 날보다 더 많이 울었던 것 같다. 그 순간 세상에 부러울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각종 소셜미디어에는 신랑에게 받은 가방이며, 시어른들께 받은 각종 작고 반짝이는 명품들이 속속 피드에 업데이트되었지만, 그 화려한 설렘이 정말 하나도 부럽지 않았다. 선물 못하는 남자랑 살면, 사소한 일상의 모든 것이 선물 같아지고 만다. 결혼 후에 처음 받아보는 고가의 선물을 받아 들고 어쩔 줄 모르게 행복한 내가 좋다. 아무 기대도 없이 점점 소박 해지는 나는 발렌타인 쌍화탕 같은 신랑을 닮아가나 보다.
고마워 내 사랑, 열심히 쓸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