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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아 Jan 05. 2021

아 왜 자꾸 뭐 먹고 싶은지 물어봐

밥 짓는 일의 숭고함에 대하여

어릴 때는 몰랐다. 엄마가 왜 자꾸 뭐 먹고 싶은지를 묻는지. 대충 그냥 맛있는 걸 알아서 해주면 좋을 텐데 자꾸 저녁은 뭐해줄까 묻는 엄마가 귀찮았다. 그냥 적당히 해주던 대로 해주면 좋겠는데 장을 볼 때마다 묻고, 온 가족이 함께 식사를 하게 될 것 같으면 또 물었다. 아빠는 간이 짜다는데 그냥 소금을 아예 안 넣으면 좋겠구먼, 왜 엄마 기준의 '적당히' 소금을 넣고 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스트레스받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장거리 여행 후나 다 같이 늦잠을 자고 일어난 주말, 그냥 한 끼 시켜먹고, 사 먹으면 될 것을 바깥 음식 먹을 게 없다며 굳이 냉장고를 뒤져 무엇을 만들어 내는지. 왜 엄마가 그렇게 피곤하게 사는지 몰랐다. 하나도 안 힘들다며 뚝딱뚝딱 요리를 해내는 엄마는 진짜 하나도 안 힘든 줄 알았다. 어릴 때는 진짜 몰랐다. 밥 먹는데 엄마가 왜 맛있냐고 묻는지. 맛있으니까 조용히 잘 먹고 있는 건데, 왜 맛있냐고 자꾸 물어보는 건지 몰랐다. 


내가 전업 주부가 되고, 주로 밥 하는 사람이 되니 이제야 그 마음을 알겠다. 밥을 먹으면서도 그다음 끼니는 무엇을 먹을지 생각을 해놓지 않으면 소중한 가족들의 끼니가 제대로 해결되질 않는다는 사실을. 아이들한테 간이 짜면 어쩌지 싶으면서도 맛있다는 이야기가 듣고 싶어 조마조마해하며 소금을 넣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밖에서 한 끼 사 먹을 값이면 훨씬 더 건강하고 저렴하게 집에서 만들어 먹일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냉장고에 꽉 찬 김치가 있으면 왜 마음이 든든한지, 한 솥 끓여놓은 고깃 국물이 있으면 안심이 되는지. 밥을 왜 한솥 해서 보온 상태로 며칠을 퍼 먹지 않고, 매일 새 밥을 해 먹이고 싶은지. 밥 하는 사람이 되고 나서야 이해하지 시작한 것들이다. 고기는 넘치게 먹는 시대라지만 그래도 복날이면 몸에 좋다는 것을 해 먹이고 싶고, 그래도 새해가 밝으면 사골 우려낸 국물에 떡국이라도 끓여내고 싶었다.


내가 밥하는 사람이 되어 보니 똑같이 하고 있다. 뭐가 먹고 싶은지 오늘 좀 더 당기는 음식이 있는지, 아니면 진짜 뭘 먹어야 할지 잘 생각도 안 나서 아이디어를 좀 주었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또 요리를 해놓고 가족들이 잘 먹어주면 정말 그것보다 행복한 일이 없었다. 맛있다 정말 맛있다 하며 꿀떡꿀떡 밥을 비워주면 그게 그렇게 뿌듯하고 내 하루 밥 짓기 노동의 위안이 되었다. 얼마든지 더 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 신랑이 맛있게 잘 먹고 열심히 제 몫을 살아내고, 아이들이 잘 먹고 쑥쑥 자라면 그것이 참 기뻤다. 내 몸뚱이가 좀 피곤해도 신랑과 아이들이 맛있게 밥을 먹어주면 그 피곤은 보람차고 즐거운 노동으로 신분을 세탁한다는 사실을. 


이 지친 일상에 글을 쓸 여유는 없다. 그래도 숨 쉬어 보겠다고, 꾸역꾸역 몸뚱이를 일으켜 컴퓨터 앞에 앉았는데, 나 참 쓰고 있는 건 또 밥 얘기네. 밥과 육아의 일상에서 벗어나서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데, 그렇게 고상하게 이야기할 거리는 내게 없었다. 밥을 짓고 밥을 먹이고, 아이를 키우고, 남편과 함께 크고. 그 눈물겹게 고단한 가사와 육아 노동이 내 삶이다. 그래서 평생 그 일을 해오신 엄마를 생각하면 밥 짓는 일, 그 숭고함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지겨워 죽겠는데, 또 내 머릿속에는 내일은 뭘 해 먹지? 질문이 머릿속을 둥둥 떠다닌다. 냉동실에 닭고기를 꺼내놓을까. 김장하고 남은 겉껍질을 끓여 우거지를 얼려놨는데, 된장 풀어 소고기 우거지탕을 끓어볼까. 아니 그렇게 먹기엔 그 소고기는 국거리가 아니라 아까운가. 아 날이 추워지니 소꼬리를 사다 곰탕이라도 한 솥 끓여 둬야겠다. 사골 국물을 끓여두면 만두도 넣어 먹고, 파만 송송 썰어 넣어 먹어도 속이 뜨끈해지겠지. 이번 주말 장 볼 때 기억해야겠다. 꼬리랑 도가니랑 파, 까먹지 말아야지. 


언제부터일까 내 온라인 장바구니엔 채칼, 휘핑기, 연기 안나는 그릴, 나무 샐러드 볼, 스테인리스 볼 등 조리 용품들로 가득이다. 문득 서럽다. 밥과 전혀 관련 없는 나를 위한 물건을 하나 사볼까. 아무래도 사치일까. 아가씨 때 좋아했던 코스메틱 브랜드의 립스틱 하나를 조심스레 골라 장바구니에 담았다가 나도 모르게 그 가격이면, 도가니를 한 팩 더 살 수 있겠구나 생각하며 빼 버린다. 나가면 내내 마스크를 쓰고 있는데 입술 색깔을 고운 색으로 칠해 뭣하리. 그렇게 내 입술의 붉은 연지는 우리 가족의 속을 덮여 줄 소 도가니와 바꿔졌다. 립스틱 하나 산다고 도가니를 못 사는 것도 아닌데 나는 왜 이 청승인가. 나는 이렇게 엄마가, 아줌마가 되어가는 걸까.


지난 주말 마트에서 할인 행사를 하는 바람에 배추와 무 한 박스씩을 용감하게 집어 들어 김장을 담갔더니 냉장고 가득 찬 김치가 얼마나 든든한지 그리고 얼마나 삭신이 쑤신 지. 결국 이렇게 내 글은 몹시 고상하지도, 숭고하지도 못하다.


딸아, 오늘 저녁엔 뭐 먹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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