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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아 Dec 09. 2020

이 돈도 안 되는 일에 대한 존중

#작가 #글쓰기 #돈도 안 되는 일 #존중 #직업인가 #취미인가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소위 경단녀(경력 단절 여성)가 되고 나서부터이다. 명함 뒤에 숨어 지냈던 시간에서 맨몸으로 나를 증명해야 할 순간이 오자 열정적으로 궁금해졌다. 늘 하고 싶었던 일이 정말 '직업'이 될 수 있는지. 말하자면 돈이 되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임신 출산 육아를 하는 와중에 닥치는 대로 썼고 틈나는 대로 썼다. 입사지원서 넣듯 영혼을 갈아 넣은 출간 계획서를 출판사 곳곳에 넣었고, 감사하게도 몇몇 굵직한 출판사들이 답을 주셨다. 그래서 결과물이 예쁜 옷을 입고 내 손에 쥐어졌을 때는 목에 힘이 살짝 들어간 적도 있었다. 이제 당당하게 스스로를 '작가'라 부를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치 하고 싶었던 일이 '직업'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걸 정말 직업으로 부르려면 돈벌이가 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월급 나오듯 수입과 연결되는 것이 결코 아님을 냉혹한 현실을 통해 배워야만 했다. 출간 작가는 다 인세를 연금처럼 받으며 사는 줄 알았다. 그런 환상은 애초에 깨졌지만, 그래도 이렇게 작가가 되기를 포기하기엔 속이 쓰렸다.


그럼 '직업'이란 무엇인가, 사전적 정의에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자신의 적성과 능력에 따라 일정한 기간 동안 계속하여 종사하는 일.'이라 나와 있다. 첫 단어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이다. 그 말은 결국 이 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글렀다. 하지만 여전히 쉽게 놓을 수가 없었다.


'출간 작가'의 타이틀을 조용히 내려놓고 통장 잔고만큼이나 겸손한 마음으로 다시 시작했다. 브런치에 글을 올렸다. 차곡차곡 글이 다시 쌓이기 시작한다. 신랑 퇴근 후, 저녁 식사 시작 전까지 약 2시간. 이 시간은 온전히 나를 위해 쓸 수 있었고, 그러므로 2시간은 2분 같이 짧았으며 동시에 귀했다. 육아를 하고 있지만 그래도 신랑이 나를 작가로 존중해주는 하루의 2시간 정도, 이 시간을 잘 활용하면 나는 이 가난하지만 애정 어린 이 직업을 유지하고 있다고 감히 자위할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나 자신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온 시간이 길어서 일까. 내 본업은 '전업 주부'이고 그러므로 이 '작가'라는 타이틀은 언제든 본업에서 밀릴 수 있는 것으로 가볍게 여겨지고 말았다. 어쩌면 종종 부끄럽기도 했다. 돈도 안 되는 이 일에 시간을 쏟아붓고 신랑에게 아이들을 맡겨 놓는 것이 타당한 것인지 스스로에게 물어야 했다. 그래서 쉽게 신랑에게 그리고 아이들에게 미안해지고 말았다. 오히려 신랑은 이 시간에 대해 눈치를 준 적도 없고, 약속한 시간을 쉽게 무시한 적도 없다. 그러나 그 귀한 시간을 없애는 주범은 타인이 아니라 결국 나였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아이들이 엄마 빠랑 같이 놀이터에 가고 싶어 한다. 신랑은 단호하게 "아니야, 지금은 아빠랑 가자. 엄마는 이제 일하러 가야 해."라고 말해준다. 그런데, 마치 그 시간에 신랑에게 양육을 미루는 것이 프로페셔널한 엄마로서 타당하지 않게 느껴져 "아, 아니에요. 애들 재우고 잠깐 쓰면 돼요. 오늘 같이 놀이터 가요."라고 말하고 만다. 당연히 아이들의 환호가 이어진다. "엄마 같이! 엄마 같이!" 하며 내 손을 밖으로 이끈다. 나 왜 저러니 정말. 입을 주먹으로 틀어막고 싶어 진다. 결국 애들 재우면 나는 같이 잠들고 그날의 글쓰기는 내일로 기약 없이 미뤄지고 만다. 마감도 없고 독촉하는 사람도 없다. 매일매일 글 한 편을 쓴다고 박수를 쳐주는 사람도, 또 입금되는 돈도 없다. 직업이 아니라 생각하면 의무도 없고 책임도 없다.


완벽하게 2시간 후에 저녁을 먹을 수 있게 식탁에 차려놓고, 아이들이 엄마를 쉽게 보내줄 수 있도록 컨디션과 기분이 좋은 채로 신랑 손에 아이들을 평화롭게 맡기고, 빈 방에 랩탑을 들고 들어올 수 있는 평일 날은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다. 육아는 내 계획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육아다.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내 본업은 '엄마'다. 엄마는 퇴근이 없다. 아이들이 엄마를 원하면 같이 있어주고, 집안일이 다 되어 있지 않으면 왠지 모를 죄책감에 글쓰기를 슬그머니 미루게 된다. 신랑의 퇴근이 예정보다 늦어지기도 하고, 가끔은 가족이 함께 가야 하는 저녁 약속이 생기기도 한다. 특히 금요일 저녁엔 신랑 퇴근 후에 장도 봐야 하고, 가족끼리 프라이데이 무비 나잇으로 정해놓은 '영화 관람 시간'도 가져야 한다. 신랑의 일은 우리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일이니 당연히 존중받아 마땅하고, 가족 시간도 다시 돌아오지 않을 귀한 순간들이니 함께 잘 보내야만 한다.


비록 찰나의 순간이지만 글을 쓰는 일이 직업이라 말하고 다닌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우리의 생계를 유지하는데 쓰이지 않기에, 당당히 직업이라 부를 수 없었다. 그래서 서글프다. 누군가 입금해주고 글을 쓰도록 종용해준다면 나는 좀 더 내 일에 당당하게 매진할 수 있을까? 신랑이 이렇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지지해주고 도와주려 노력하는 복에 겨운 사람인데도, 나는 내 '작가'라는 직업이 꼭 허울 좋은 취미로만 느껴진다. 이 돈도 안 되는 일에 대한 존중을 배우려면 나 스스로 어떤 마음 가짐을 가져야 할까.


생각을 멈추고 돌아보니 일단 전제가 틀렸다. 직업이라는 정의가 단순히 '일하는 시간이나 돈'이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되는구나. 지금 당장 입금이 되지 않더라도, 하루 겨우 2시간 일할지라도, 나는 내 본업이 '주부'가 아니라 '작가'라는 사실을 스스로 인지해야 한다. 스스로에게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한다. 직업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함이라 사전이 말한다. 그렇다면 생계의 정의를 찾아본다. '생계 (生計)' 란, [명사] 살림을 살아 나갈 방도. 또는 현재 살림을 살아가고 있는 형편. 아 그렇다! 살림(한 집안을 이루어 살아가는 일)을 살아 나갈 방도에서 주축을 이루는 부부의 몸 건강과, 정신 건강 상태는 매우 중요하다. 더불어 주 양육자인 엄마의 정신 건강이 집안 살림에 미치는 영향이란 실로 엄청날 것이다. 내가 내 직업을 갖고 있고, 그 일을 사랑하며 열정적으로 유지해나갈 수 있다면, 그것은 당당히 나의 '직업'이어도 된다.


그래. '나는 작가다.' 내가 일하는 하루 2시간은 매우 귀하다. 비록 지금 배고프고, 자본주의 사회의 기준에 조금 부합하지 못할지라도. 나는 이제 당당하게 말하려 한다. 내가 이 돈도 안 되는 일에 대한 뿌리 깊은 존중을 갖고, 그 태도로 스스로를 대해줄 때, 나는 한 글자라도 쓸 수 있다. 지금 당장 손에 잡히는 결과물 없이 꿈을 위해 매일의 시간과 영혼을 갈아 넣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모든 예술가들이 처음부터 빛나는 조명 아래 세상의 넘치는 박수를 들으며 작업하길 원했다면 세상을 바꿔놓은 그들 작품들은 지금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도 시작할 때부터 비틀스였고, 반 고흐였으며, 테슬라 회장이었고, 처음부터 박완서이고, 김훈일 수는 없다. 꿈꾸는 것은 돈도 시간도 들지 않는다. 다만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 돈도 안 되는 일에 대한 존중을 갖고 버텨내야 한다. 적어도 나는, 나를 믿어주어야 한다.


통장 잔고 앞에 움츠러들 때면, 직업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봐야겠다. 나를 성장시키는 그것, 그것이 진짜 내 직업이다. 그리고 혹시 이곳에 저 말고 또 배고픈 브런치 작가님들이 계시다면, 우리 같이 달려요! 함께 존-버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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