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라몰라 개복치 남동생의 연애사
#개복치 #연애 좀 해라 #HSP #섬세한 사람들 #그들이 사는 세상
아래 개복치 연애사 1편에서 이어집니다. 개복치의 학명 "Mola mola" 몰라몰라 모르겠다 너의 연애.
https://brunch.co.kr/@illiajungin/63
지난 주말 드디어, 썸의 그녀를 만나고 왔다고 한다. 수개월이 지났지만 카톡으로 약속을 잡고 다시 어떻게 시작될지, 끝날지 알 수 없는 만남을 준비하는 과정은 설레고 두근거렸으리라. 1편에서도 밝혔지만, 나는 동생이 그 썸녀에게 먼저 연락하는 것이 싫었다. 첫째 동생이 한 번 마상(마음의 상처) 입은 관계에 다시 영혼을 갈아 넣는 것을 보기 싫었다. 둘째, 그 여자분이 정말 동생 상처 받을까 봐 미리 거절해주신 것이라면, 용기가 없더라도 다시 시작할 때는 본인이 먼저 연락해주는 배려 정도는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었다. 셋째, 주선자 분께도 '좋은 분 같은데 그때 자기 상태가 좀 별로였어서 타이밍이 안 맞았을 뿐이었다.'며 미련을 일부러 표현할 정도로 마음을 있다면, 좀 제대로 마음의 줏대를 가지셔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러니 최소한 연락을 먼저 할 정도의 '결심'정도는 하고 다시 만나야 그녀의 우유부단함을 없앨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이 관계가 적어도 '친한 친구'를 만드는 자리는 아닐 테니 말이다. (그렇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적고 보니 어쩔 수 없이 팔은 안으로 굽는다.)
하지만 주선자를 포함한 모든 동생 주변의 친구들은, 그래도 '남자'가 먼저 연락하는 편이 낫지 않겠냐며 동생을 부추겼다. 다시 연락해보고 아니면 말면 되지, 그녀가 마음이 남아 있다는데 왜 다시 연락 한 번 해보는 걸 그리 어려워하느냐. 그냥 밥 한 끼 더 먹어봐라. 아니 상대방이 '정말 싫다. 다신 연락하지 마라.' 그 정도 들어야 '거절' 아니냐. 상대가 더 연락을 오래 하다가 상처 받을까 봐 미리 서둘러 '자기는 아직 마음을 잘 모르겠다' 정도로 표현한 거라면 거절이라 표현하기도 어려운 것 아니냐. 그렇게 뜸 들이다가는 죽도 밥도 안된다. 누군가는 한 발짝 더 다가가야 뭐가 돼도 되지 않겠느냐며 동생이 소심하게 굴어서 다 된 관계를 시작하지 못하는 것인 양 다그쳤다.
동생의 주변분들 말이 아주 틀린 것은 또 아니다. 누군가는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하고, 정말 마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진심으로 거절당하기 전까지 찍어봐야 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동생의 개복치 같은 면모를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가 얼마나 섬세하게 상대를 읽을 수 있는지도 알고 있다. 그래서 상대가 좀 더 확실히 표현을 해준다면 우리의 개복치가 더 용기 내어 상대의 마음을 끌어낼 수 있을 텐데 싶었다. HSP (Highly Sensitive Person) 성향의 사람들은 관계에 예민하기 때문에 쉽게 지치기도 한다. 그래서 아주 잘 맞는 내 사람이 아니면 가까이 두고 시간과 공을 들이고 싶지 않아 한다. 동생의 좁고 깊은 인간관계를 알기에, 그의 연애 장벽이 얼마나 철옹성같이 높고 단단한지 알기에 더욱 그녀가 제발 더 적극적으로 마음을 표현해주었으면 싶었다. 그의 울타리 안에 들어온 여자 사람을 본 것이 거의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HSP 성향의 여자 사람을 보고 그 동질감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만나 저녁을 함께 먹고 카페에 가서 차도 마시고, 오랜만에 만나 그간 지낸 이야기를 한참 즐겁게 나누었다고 한다. 자, 여기까지 들었을 때 이미 누나와 엄마는 쾌재를 부르며 김칫국을 호로록 들이켰다. 나는 '내가 이 나라에서 시민권을 얻어 형제 초청을 하면 동생은 17년 후에나 들어올 수 있을 텐데 그럼 동생이 50이 돼야 들어오겠네. 지금 이 분과 결혼해서 당장 아기가 생기면 그 아이가 고등학생 때가 되어야 되겠구나, 동생들은 아마 중학생쯤 되려나. 좀 더 일찍 미국에 올 수 있는 방법을 찾아봐야겠다. 가까이 살면 좋을 텐데. 내가 잘 챙겨줘야지 우리 동서.' 같은 생각을 했다. 한 편 엄마는 '그분이 동생보다 연상이라던데, 당장 올해 결혼해서 아기를 가져도 꽤 노산이라 건강이 괜찮을까 걱정이다.' 등등의 요새 애들 들으면 기겁할 생각을 말이다. 엄마와 나는 정말 웬 오지랖인가. 좋은 시어머니와 시누이 되긴 글렀다고 생각하며 한편으론 내가 미국에 와있길 천만다행이라 생각했다. 물론 동생한테 이런 이야길 했다간 카톡에서 영원히 차단당할 것 같아 당연히 하지 않았다. 엄마와 누나가 들떠서 둘이 수다를 떨었을 뿐이다.
그로부터 겨우 이틀 후, 동생에게서 카톡이 왔다. "잘 안됐다. 걍 안댓으니까 더 이상 궁금해하지도 물어보지도 말라." 아니 이게 무슨 일인가! 대체 왜. 하나뿐인 미혼 동생의 연애사가 몹시 궁금한 아주매미는 궁금해 죽겠는데. 궁금해하지도 묻지도 말라니 마셨던 김칫국물이 식도가 아니라 기도로 넘어간 듯 헛기침을 해댈 수밖에 없었다. 눈치를 봐가며 엄마한테 슬쩍 물었더니 엄마도 비슷한 류의 통보를 받은 것 같았다. 그러고 나서 엄마는 좀 어린 친구 만나면 좋겠는데 잘 됐다며 여전히 조선시대 시어머님 같은 톤의 말을 하셨다. 궁금증이 병이 될 것 같아 눈치를 봐가며 개복치의 멘털이 너덜하지 않을 시간, 조용히 전화를 걸었다.
동생은 다행히 괜찮아 보였다. 괜히 이런저런 신변잡기를 한참 이야기했다. 누나가 왜 전화했는지 알고 있는 그는 먼저 말을 꺼냈다. 그분을 만났을 때는 잘 만나고 왔고, 재밌었고, 괜찮았다. 그리고 만난 다음 날부터 연락을 다시 하기 시작하며 '이건 아니다.'싶은 촉이 왔다고 한다. 또 거절은 아니었으되, 본인만큼 이 관계에 의지가 있지 않은 것 같아서 그냥 연락을 그만두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그 여자분은 아주 매우 굉장히 천천히 사람을 알아가는 사람이었을 수도 있고, 또다시 말하자면 밀당에 능한 사람이었을 수도 있다. 그냥 소위 어장관리였던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으면 그저 몹시 마음이 갈대 같아서 우유부단한 분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동생이 분명 '괜찮은 사람'이라고 느껴서 주선자에게 미련이 남아 있다고 말하고, 다시 동생이 연락을 하도록 유도했지만 그렇다고 자기가 먼저 다시 만나보자고 말할 만큼 마음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이게 뭔지 쓰면서도 제 속이 답답해지네요. 으 답답해요. 사이다! 사이다 좀!)
동생은 누나가 워낙 자기 걱정을 할까 또 걱정이 되었는지, 처음만큼 상처를 받거나 그럴 것도 없는 것 같다. 그냥 자기도 미련이 있었는데 다시 만나고 연락 보니까 차라리 아 이건 안될 관계구나 싶어서 미련마저 깔끔하게 정리되는 것 같다고 했다. '거 봐라. 네가 먼저 연락하지 말랬잖아.'가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그래, 잘했네. 다 경험이지. 그리고 너무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끼리 연인이 되기는 쉽지가 않은 것 같다." 정도로 마무리했다. 우리 신랑과 나를 보면 정 반대의 성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관은 비슷하다. 예를 들면, 나는 무척 외향적이지만 신랑은 무척 내성적이다. 나는 무척 술을 좋아하지만, 신랑은 무척 달콤한 디저트를 좋아한다. 하지만 둘 다 인생에서 추구하는 목표는 같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는 일치한다. 그래서 각자 자기가 가지지 못한 다른 부분에 끌렸고, 결혼 후 함께 해야 하는 중요한 미션은 같이 뜻을 맞춰 잘 일궈나간다.
동생은 같은 HSP 여자 사람을 만나 굉장히 비슷한 사람임을 느꼈고, 그래서 첫 만남에 오래 만난 친구 같은 편안함을 느꼈다. 그리고 그녀야 말로 자기가 찾던 인연이라 느꼈던 것 같다. 둘의 관계가 이성이 아니라 동성이고, 썸이 아니라 어느 동호회에서 만난 친구였다면 쉽게 절친이 되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나 이런 조심스러운 썸의 관계에서 둘은 서로를 몹시 배려하고, 생각하고 또 어떤 면에서는 고요하고 잠잠했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니까 아줌마스럽게 좀 표현하자면, 남녀가 둘이 만나 눈에 파파박! 스파크가 튀려면 그런 에너지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연인이 된 이후에 불꽃 튀는 싸움이 되더라도. 둘의 관계에서는 그런 것이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 만남을 통해 또 생각하게 되는 것은, 한 번 돌아섰던 인연은 썸이든 쌈이든 연인이었든 부부였든 다시 만나 다시 잘 될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다는 점 정도 일 것 같다. 연애계의 오랜 정설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도 똑같은 이유로 다시 헤어지게 된다.'는 것. 비록 시작도 못하고 개복치의 영혼만 바사삭 부서진 채 끝나버린 관계이지만 그래도 동생의 성숙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길 바라본다.
"헤어졌던 사람들이 다시 만나서 잘 될 확률은 3%밖에 안 된대. 나머지 97%는 다시 헤어져. 처음 헤어졌던 이유랑 똑같은 이유로."
— 영화 <연애의 온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