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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아 Feb 23. 2021

시누가 몸조리를 해주겠대

#진실은 항상 관계를 위한 최선일까 #시누이와 올케 사이

손위 시누이가 나의 몸조리를 해주러 아주버님과 함께 한 달간 우리 집에 와서 지내겠다고 한다. 시누는 최근에 결혼을 하였고 아직 아이가 없다. 외국에 가족이 없는 처지이니 하나뿐인 가족이 몸조리를 해주러 오시겠다고 한다. 고맙지만 사실 많이 불편하다. 이건 정말 감사해야 할 일인가 아니면 정중히 거절해야 할 일인가. 아니 우선 이것은 가능한 일인가. 시누이와 올케가 어떤 관계에 있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우선 시누이와 우리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를 먼저 해야겠다. 내가 기억하는 몇 가지 에피소드(에피소드라 적고 흑역사라 읽는다.)들을 꺼내 보자.


하나, 결혼 전 시누이는 맏딸임에도 불구하고 집안의 막내딸 같은 역할을 맡고 있었다. 애교 많고, 즉흥적이고, 사고를 잘 치고, 철이 없는 캐릭터였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말 수도 적고, 모범생에 효자 아들이었던 우리 신랑이 집안의 큰 오빠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다. 내가 결혼 전 우리 신랑이 나보다 연하인데도 오빠 같다고 말하자, 시누이 언니는 당연하다는 듯이 "응, 나도 쟤가 오빠 같아."라고 했다. 정말 우리 신랑에게 친오빠같이 기대고, 많은 부분 의지했다. 그래서일까 우리가 결혼을 서두르자 다른 누구도 아닌 시누이가 무척 반대를 했었다. 단순히 올케가 될 내가 마음에 안 든다거나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냥 자기가 술 마시면 늘 데리러 오고, 무서우면 지켜주고, 힘들 때 한결같이 든든하게 있어주는 오빠 같은 존재를 다른 여자에게 빼앗기는 것이 싫었던 것이다. 애석하게도 우리 시부모님들은 조선 시대 마인드의 소유자들이셔서 결혼을 하면 며느리는, 특히 맏며느리는 시댁에 들어와 함께 살아야 하는 것이 응당 당연한 일이라 생각하시는 분들이셨다. 그래야 진짜 가족이 되는 것이라 하셨다. 처음에는 이 말도 안 되는 제안에 머리를 얻어맞은 듯 멍해졌으나, 시간이 지나며 그것에 수긍하지 않으면 이 결혼이 성사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결국 나는 내 눈을 내 손으로 찔렀다. 그리고 그 철없는 손위 시누와의 동거도 함께 시작되었다.


둘, 시누는 오랜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동생이 먼저 장가를 가서 서글픈 데다, 언니는 연애는커녕 자기 관리가 전혀 안 되는 상태였다. 그 분노의 화살은 곧장 나에게 와서 꽂혔다. 시누는 술을 마신 새벽이면 내 폰으로 내가 안 받으면 신랑 폰으로 전화를 해대었다. 새벽 두 시경, 갑작스럽게 울리는 벨소리에 화들짝 놀라 깨어 전화를 받으면 어김없이 시누 언니였다. 흐느끼는 소리와 함께 어딘지 모르겠지만 여기는 한강 다리라는 이야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야 했던 '죽어버릴 거다. 이 가족에서 나만 없어지면 된다.' 결혼 후 금방 아기가 생겨 첫째 임신 중이었던 나는 긴장과 스트레스로 돌처럼 굳어진 배를 안고 운전대를 잡아야 했다. 가까운 한강 다리를 다 뒤져 언니를 찾아와야만 했다. 자살하고 싶다는 마지막 메시지를 받은 것이 나라면 그리고 내가 구하지 못해 설사 정말 죽기라도 한다면 어쩌나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어찌어찌 겨우 술이 떡이 된 시누이를 신랑이 엎고 우리 집으로 들어오면 끝도 없는 울음소리가 마루 바닥에서 울려 퍼졌다. 서럽게 울며 내게 "너 싫어! 나가! 나가!" 악을 쓰며 나의 임신한 배를 손으로 확 밀어버렸다. 신랑은 급히 나를 옆 방으로 대피시키고 시누 언니를 침대로 데려가 눕혔다. 언니는 신랑에게 자기를 '안아서 재워달라.' 했다. 나는 옆 방에서 쪼그리고 앉아 뭉친 배를 끌어안고 부들부들 떨며 울었다. 결혼 한지 불과 반년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서럽고 무서웠고 억울했다. 그런 일이 반복되던 어느 날에는 스트레스로 하혈을 하기도 했다. 다행히 산부인과가 가까워서 바로 다녀올 수 있었고, 스트레스받지 않고 안정이 필요하다는 결론 말고는 얻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셋, 그런 다음날 아침이면 시누 언니의 정신과 상담이 있었다. 당연히 제시간에 못 일어나는 시누 언니를 깨운다. 정신과에 혼자 가기 싫다는 언니의 손을 잡고, 택시를 타고 같이 병원에 간다. 상담실 밖에서 한 시간 혼자 기다리고 상담이 끝나면 밥을 사먹인다. 공황장애도 심해서, 밥을 먹다가도 숨을 쉬지 못하겠다며 식당을 뛰쳐나가기 일쑤였다. 꾸역꾸역 남은 밥을 입에 욱여넣고 얼른 따라나선다. 신랑은 가족들이 힘들게 해서 미안하고 부끄럽다고 사과를 했다. 한 지붕 아래에서 시댁에서 함께 사는 삶이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나를 든든하게 지켜줄 것만 같았던 신랑은 출근은 해야 했고, 가끔은 해외로 출장도 가야 했다. 임신 소식을 알고, 양가 어른들의 무언의 압박에 멀쩡히 다니던 직장까지 그만둔 나는 그때에 나를 지키는 법을 몰랐다. 그때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 그저 그것이 나에게 맡겨진 새로운 역할인 줄 알았다. 그래서 시부모가 돌보지 않는 시누를 열심히도 돌보았다. 아무 감정을 가질 수 없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다시 배가 돌처럼 뭉쳐왔다.


넷,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누는 끊임없이 우리 신랑에게 나에게 서운함을 표현했다. 우리 집에 들어오면 계속 치킨이며 햄버거를 시켜먹고 앉아서 유튜브를 보고, 그러면서 자기 방으로 가지 않았다. 신랑이 이제 가달라고 요청하면 더럽고 치사하다며, 서럽고 외롭고 서운함을 온몸으로 표출해댔다. 신랑 카드로 자기가 갖고 싶은 걸 사고, 먹고 싶은 걸 먹는 것이 형제 사이엔 당연하다 느끼는 듯했다. 신랑은 잘 벌고 자기는 못 버니까. 당당하게 원하는 것을 요구했다. 우리는 열심히 소개팅을 주선했고 드디어 시누는 신랑의 친구의 친구를 만나 3개월 만에 결혼을 했다. 결혼을 하면 이제 정말 이 책임과 관계가 좀 가벼워질 것이라 기대했던 내가 잘못이었다. 사람은 바뀌지 않았다. 이번 설엔 친정에 오듯 우리 집에 설을 지내러 오겠다더니, 와서 정말 편하게 앉아 '한식을 원 없이 먹고 가야겠다.'라고 선포했다. 그리고 정말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애 둘에 임산부인 내가 해주는 요리를 삼시 세끼 편하게 드시고 가셨다. 떡국에, 전에 갈비탕에 식혜까지 만들어 먹이고 떠나는 손에는 담근 김장 김치며 떡이며 열심히 챙겨 보냈다. 그리고 가면서 "네 출산 예정일 맞춰서 올게! 그때는 한 달 정도 여유 있게 와야지~ 신난다." 하며 떠났다. 정말 나의 몸조리를 해주러 오는 사람이 저렇게 신날 일인가. 그 마음 가짐으로 오는 시누이를 나는 대체 어떤 마음 가짐으로 맞아야 하는 걸까.


집으로 돌아간 시누에게 신랑이 몸조리를 해주러 오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자, 육아 중인 나와 근무 중인 신랑에게 번갈아 수차례 카톡을 보내 묻는다. "나는 네가 너무 편한데, 너는 혹시 내가 조금이라도 불편하거나 그래? 내가 불편해? 솔직하게 말해줘." 돌려 돌려 '아무래도 아주 쉬울 수만은 없는 관계인 것 같다. 물론 보러 자주 와주고 아이들에게 고모가 있어 참 고마운 부분도 있지만, 친구같이 편하다기보다는 아무래도 좀 어려운 부분은 있다.' 이야기했지만 계속 반복하여 묻는다. 아마 '언니 불편한 거 없어요. 너무 고맙죠~ 몸조리 와주세요! 보고 싶으니 와서 한 달 편하게 같이 지내다 가요!'라는 말이 듣고 싶은 것이겠지. 돌아보면 난 진심 담긴 속말은 꺼내지도 못하고 이제까지 그래 왔으니까. 지난날 거짓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해왔던 모든 리액션을 반성한다. 존경하는 조던 피터슨 교수님이 늘 이야기하셨는데 '언제나 진실만을 말하라. 적어도 거짓말은 하지 마라.' 그리고 천주교 십계명에도 있다. '거짓 증언을 하지 말라.' 나는 대체 이 관계에 있어 얼마나 꾸준히 거짓을 말해왔었나. 그렇다면 모든 것이 거짓이었을까. 그럼 대체 어디까지가 진실이었을까. 나는 단지 '관계의 평화'원했을 뿐이다. 거짓 평화여도 상관없었다. 불편한 가족 관계를 마음속에 짊어지고 사느니 거짓말이더라도 내가 불편하고 마는 것이 나았다. 그래서 늘 웃으며 거짓 평화를 유지하려 애썼다.


하지만 이번엔 조금 더 용기 내어 속의 말을 했다. "진짜 솔직하게 한 마디만 해도 될까요... 언니가 불편하고 어려울 때가 있어요." 하필 아이들이 아파서 토하고 있는데, 언니가 아픈 애를 안고선 자기가 돌보는 것처럼 굳이 한국 시댁에 전화드려 그것을 실시간 말씀드리는 것이 참 불편했고, 시부모님이 어떻게 왜 우리 때문에 화가 나셨는지 그걸 우리한테 전달하는 언니가 불편하고 마음이 어렵다고. 그랬더니 그때부터 연락을 씹는다. 카톡 읽씹. 그러더니 신랑에게 카톡이 와서 '다 자기 탓이고 이제 다시는 연락을 안 할 테니 그렇게 알라고' 이야기한 후 연락을 끊어버렸다. 이런 행동 패턴은 자기가 맨날 흉을 보는 본인 어머니와 참 소름 끼치게 닮았다. 속마음은 내가 연락해서 사과를 하길 바라는 마음이겠지. 사과를 하는 것도 우습다. 솔직하게 말한 것에 대해 '솔직해서 미안하다'라고 사과해야 할까. 불편한 것을 '불편하게 느껴서 미안하다'라고 해야 할까. 그 후엔 예상한 수순대로 흘러갔다. 시댁에 전화해서 또 울고 불고 억울함을 호소했겠지. 시부모님이 '너는 대체 어떻게 쌀쌀맞게 말을 했길래 애가 마음 상해서 저러느냐.'라며 전화가 오셨다. 예상했던 그대로이다. 이게 다 내가 솔직하게 불편하다고 말해서 일어난 일이다. 그냥 제발 우리끼리 잘 살게 좀 내버려 두면 참 좋겠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온다.


시누가 몸조리를 해주러 온다고 한다. 예전처럼 속마음은 몸속에서 사리가 되도록 다 넣어두고, 몸조리고 뭐고 다 치우고 한 달간 시누와 아주버님과 지내는 것에 몸과 마음을 갈아 넣었어야 했을까. 아니면 그냥 미움받을 용기를 가지고 솔직하게 말하길 잘한 일일까. 솔직하게 말하고 나면 속이 시원할 것만 같았는데, 또 그렇지만도 않다. 모르겠다 아직도. 엉켜버린 시댁과의 관계가 또 마음 한쪽을 묵직하게 눌러 온다. 이래도 저래도 편하질 않다. 비슷하게 어려운 시댁을 가진 가까운 친구가 농담처럼 한 말이 자꾸 뇌리에서 맴돈다. "전생에 나라까진 아니어도 우리가 뭘 팔긴 팔았나 봐." 난 대체 전생에 뭘 팔아먹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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