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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아 Feb 19. 2021

쉰 살의 내가 지금의 나를 만난다면

#상담노트 #연애상담 #썸과 남사친 사이 #20대의 연애 #자존감

"왜 저한테 관심을 잃었을까요?"


알바를 하다 만난 동갑 남사친(남자 사람 친구)이 있어요. 같이 알바를 하면서 친해졌고, 점점 더 가까워질 무렵 제가 그 알바를 그만두게 되었어요. 그 후로도 개인적으로 연락을 자주 주고받고, 제 생일에는 그 친구가 케이크도 사주고 그래서 같이 시간도 보냈거든요. 제가 아프다면 기프티콘도 보내주고, 먼저 전화해서 3시간이 넘게 통화도 했었어요. 근데 최근에 이런 애매한 관계를 계속 끄는 것이 답답해서 동성인 친구에게 상담을 했더니 내가 먼저 그 남자에게 마음의 확신을 줘야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지난주에 만나서 같이 산책하면서 제가 초콜릿을 선물했어요. 마음 표현도 어느 정도 한 것 같고요. 근데 그 이후로 이 친구가 연락을 잘 안 해요. 제가 연락을 먼저 해도 단답으로 끊고, 먼저 보자는 말도 안 하고요. 둘이 만나면 재밌었고, 잘 맞는다고 느꼈는데 그리고 분명 이 친구도 저에게 관심이 있어서 그렇게 잘해줬던 것 같은데 왜 갑자기 저한테 관심을 잃었을까요? 


20대 초반의 친구였다. 이 친구는 사랑스러웠고, 순진했고 배려가 넘쳤다. 착하고 여린 이 친구에게는 지금 이 썸남의 문제가 무척이나 중요해 보였다. 그래서 늦은 시간까지 잠도 못 자며 고민 상담을 해온 것이었다. 그 썸남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데, 그녀를 대하는 방식을 보니 공익 근무 중이라는 그 남자는 전혀 좋은 사람 같아 보이지 않았다. 인성적으로나 사회적으로도 배울 점이 많은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다만 이 친구가 아무래도 자기 확신이 없어서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따뜻하게 대해주는 사람을 만나면 자기도 모르게 마음을 완전히 의지하는 듯했다. 그 썸남의 연락만 기다리며 폰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왜 알바를 할 때처럼 자기에게 웃으면서 먼저 말을 걸어주지 않는 것인지, 그럴 거면 왜 이렇게 자기한테 먼저 잘해준 건지 모르겠다며 답답하고 화가 난 상태였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이 친구는 지금 가정도 지금 풍비 박산 났고, 마음을 나눌 동성 친구도 별로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기는 왜 이렇게 늘 의기소침해져 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전반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그 친구가 하고 있는 알바도, 언어 구사 능력도, 아니 그냥 다 떠나서 나이만 보아도 그녀가 세상에 기가 죽어 있을 이유는 없어 보였다. (내가 저 나이로 돌아갈 수 있다면 세상을 구할 수 있을 것만 같은데? ) 누군가에게는 마냥 부러울 시기인데 스스로는 전혀 그렇게 느끼지 못했다. 세상에 얼마나 괜찮은 사람이 많은데, 그 썸남에게 모든 것을 걸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 관계에서 자기를 증명받고 싶은 것 같았다.


결국 문제는 그녀의 마음 상태가 몹시 위축된 것에 있었다. 무척 의기소침했고, 자존감이 떨어져 있었다. 자기 자신에 대한 평가의 기준이 스스로에게 있지 않고 다른 관계에 가있었다. 가족이, 친구가, 썸남이... 계속 되풀이되는 그녀의 인간관계 실패담에서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자꾸 작아져 가는 듯했다. 결국엔 그게 다 자기가 아싸(아웃사이더)이기 때문이라 자책했다. 그 관계에 대해 곱씹고, 카톡을 분석하고 상처 받고, 자책하고 자존감을 긁어내고 있었다. 그래서 우선 그것을 멈출 것을 요청했다. 그런 것들에 시간을 낭비하기엔 세상은 너무 넓고 그 친구가 가진 잠재력은 정말 컸다. 세상에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에 미쳐서 시간을 보내다 보면, 시간이 부족할 터였다. 그녀의 집중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싶었다. 더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곳에 에너지를 쏟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20대의 버킷리스트'를 작성해볼 것을 제안했다. '해외 배낭여행, 바디 프로필 찍기, 새로운 알바, 자격증 따기, 국토대장정, 스카이 다이빙,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취미 갖기, 봉사 활동, 종교가 있다면 종교 활동, 관심 있는 분야의 전문가 만나서 밥 사달라고 하기... 등' 지금 아니면 하지 못할 일들을 한 번 적어보라고. 그리고 거울을 보며 매일 자기 체면을 거는 법을 전달했다. 내가 얼마나 사랑받아 마땅한 존재인지, 내가 얼마나 예쁜지, 내가 얼마나 괜찮은지, 내가 얼마나 멋진지, 내가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 내가 얼마나 매력적인지, 매일 말해주라고 말이다.  


연애 상담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결국 인생 상담이 되었다. 상담 끝에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감사하다고 했다. 내가 그녀의 떨어진 자존감을 캐치해주고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처방전을 주었다고 했다. 사실 한 번의 상담으로 인생이 바뀔 리 없다. 스스로 더 나은 것에 뜻을 두고 꾸준히 노력하지 않으면 관성의 법칙에 의해 쉽게 제자리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잠시나마 그녀가 자기 자신을 안아줄 용기가 생겼다니, 그것으로 다행이다 싶었다.




이 상담을 마치며 나는 문득 '나는 이 친구 나이에 무엇을 하고 있었지?' 생각해본다. 그 친구의 나이에 내 나이의 차이를 지금의 내 나이에 더해 보았다. 그러자 거기에 50대가 된 내가 지금의 나를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 결국 이 모든 것이 어쩌면 쉰 살의 내가 지금의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겠구나. 왜 나는 자꾸 의기소침하게 작아져 가고 있었을까 생각해보면, 나에 대한 평가 기준을 타인에게 두었기 때문이었다. 


돈을 버는 신랑과 애를 보는 나를 경제적 관점으로 비교하며 돈 한 푼 제대로 못 벌어 오는 내가 비참하게 느껴졌다. 미국 교포인 신랑과 한국 사람인 나를 영어로 비교했다. 왜 나는 저만큼 유창하게 멋있게 말하지 못하는 걸까 생각하며 스스로 삽을 들고 땅 아래로 아래로 자꾸 내려가고 있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잘하기 위해 몸부림쳐도 어렵기만 한 시부모님, 시형제들과의 관계를 곱씹으며 내 인성을 탓했다. 내가 못나서 그래, 내가 성격이 좋으면 시댁 관계가 하나도 어렵지 않았을 텐데. 내가 더 예의 바르게 대했으면 내게 화나시지 않았을 텐데, 내가 육아를 더 잘했다면 나에게 아무 잔소리 없이 그냥 믿어주셨을 텐데. 내가 부족해서 내가 못나서 내가 잘못해서... 이렇게 나를 파먹고 있었다.


그러면 50대의 내가 지금의 나를 꼭 안아주며 말해줄 것만 같다. "아니 자책하지 마라. 아무것도 네 탓이 아니다. 너 정말 애쓴다. 충분히 잘하고 있다. 기특하다. 훌륭하다. 쓸모없는 관계와 타인의 평가에 삶의 기준을 두지 말아라. 타인의 의견이 대체 왜 그렇게 중요한가. 왜 남과 너를 옳지 않은 기준으로 비교를 하느냐. 너는 지금 이 세상 누구보다 의미 있고 가치로운 일을 하고 있다. 뱃속에 아가 하나, 배 밖에 둘 그리고 존경하는 신랑을 잘 서포트하고 있다. 우리 가족을 누구보다 더 헌신적으로 그리고 즐겁게 잘 지켜왔다. 쓸데없는 것에 에너지를 쏟기에 인생은 생각보다 짧단다."


잘하고 있다. 그래 정말 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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