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에도 용기가 필요하다
‘비겁하게 도망치지 말고, 용감하게 맞서 싸워!’
이 문장에서 불편함을 느낀다면 당신은 습관성 도망자가 틀림없다.
그리고 나 역시 거기에 해당한다.
우린 ‘비겁’이란 단어와 ‘도망’이란 단어를 함께 쓰는 것이 합리적이고, 조화롭다고 느끼게 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하지만 용기가 없는 사람이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용기가 있는 사람이 도망도 칠 수 있는 법이다.
신은 인간에게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고난을 준다는 말, 나쁜 경험이든 좋은 경험이든 지나고 나면 모두 나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된다는 말을 믿고, 그 말들을 곱씹으며 고통을 참아내는 편이지만, 한편으론 내가 습관성 도망자라는 사실 또한 분명하다.
비바람을 이겨내고 태풍도 이겨내야 튼실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건 맞지만, 늘 그렇듯 지나고 나면 그렇다는 거지 지금 당장 내가 힘든데 미래를 위해 현실의 고통을 직격타로 견뎌내는 것은 만만치 않다. 나에겐 미래의 깨달음과 행복만큼이나 현실의 고통을 줄이는 일도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나는 도망자가 되었다.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면 내가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는 도망의 시작은 고등학생 때이다. 우리나라에서 10대를 보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그 시절. 나 역시 오랜 시간 앉아 있는 것이 괴로웠고 대학만 가면 해결된다는 달콤한 속삭임에 아름다운 10대의 마지막을 고통 속에 허우적대며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스무 살 성인이 되고 대학에 가면 펼쳐진다는 자유롭고 아름다운 캠퍼스 생활은 쉽게 손에 잡히지 않고 너무나 먼 허상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난 스스로 보호해야 한다는 본능 속에 도망칠 곳을 찾았고 그 도피처는 바로 책이었다.
고등학생 때 정말 책에 빠져서 열심히 봤는데 시험 전날에도 ‘셜록 홈스’를 펼쳐 들고 읽던 기억이 난다. 고3 때 특히 난 셜록 홈스 시리즈에 빠져 있었는데, 주인공 셜록에게 빠져 시리즈를 다 읽었을 땐 이별의 아픔에 눈물을 글썽거릴 정도였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자기식대로 사건을 시원하게 해결해 가며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 셜록의 모습에 대리만족을 느꼈던 것 같다.
다음으로 절정에 이르렀던 시기가 바로 사회 초년생이었던 20대 초반부터 중반까지였다. 그땐 취미 서적이나 수필을 주로 읽었는데, 마침 돈도 벌면서 책을 엄청나게 샀던 시기였다. 매달 책을 몇 권씩 샀고, 서점에도 자주 갔는데 회사 생활이 너무 힘들고 답답해서 어떻게든 잊고 싶어 책에 빠져들었다. 당시엔 그림, 손바느질, 요리, 손 글씨 등 정말 다양한 취미 서적을 비롯해 사람 사는 이야기를 담은 수필도 그 종류를 막론하고 손에 잡히는 대로 마음껏 샀다. 책 속에 나오는 사람들은 나와 달리 특별한 인생을 사는 듯 보였고, 나는 그들을 마음껏 부러워하고 엿보며 그들처럼 살고 싶다는 꿈을 꿨던 것 같다.
내 인생의 가장 기억에 남는 두 번의 도망자 시절에 책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내 마음속에 휘몰아치는 수많은 감정과 생각들을 누군가에게 털어놓기도 힘들었던 그 시절, 만약 나에게 이런저런 책들이 없었다면, 그 책들 속에 나를 쏟아붓지 않았다면 난 아마 심하게 탈이 나거나 지금의 모습과 많이 달랐을 수도 있다.
신기하게도 부정적인 생각은 늘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 마치 늪처럼 두려운 감정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만드는 무서운 녀석이다.
하지만 그런 상황일수록 오랜 시간 단련된 나의 도망 실력은 빛을 낸다. 나의 궁극적인 도망의 목적은 나의 마음을 흔들고 힘들게 하는 생각들이 나를 지배하게 내버려 두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나를 보호하는 일이니까.
좋아하는 일만 할 수 없다는 걸 안다. 싫어하는 일, 어려운 일도 헤쳐 나가야 한다는 걸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가끔은 한 발 뒤로 물러나 남들 눈에 띄지 않는 샛길에서 잠시 쉬어 가거나 멈춰 서서 휴식을 취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모두 ‘힘들어도 도망치면 안 돼!’라고 말하지만, 난 오히려 ‘버티지 말고 도망쳐!’라고 말하고 싶다. 선택에 관한 결과를 내가 감당할 수 있다면, 그러한 생각의 끝에도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난 도망쳐도 된다고 믿는다.
고등학교 시절, 시험 전날 셜록 홈스 한 권을 다 읽고 그날 밤이 새도록 시험공부를 했던 날들이 있다. 회사 생활을 하면서는 충실히 맡은 바 일을 다 했고, 도망치고 싶다는 핑계로 하루도 허투루 내 할 일을 미뤄본 적은 없다. 힘들 때면 난 언제나 내가 도망칠 틈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생각하며 버텼다. 아직 넘기지 못한 한 페이지 뒤의 이야기를 상상하며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의 고통을 잊으려 했다. 어쩌면 거창하게 도망이라 부르기도 힘들지 모를 나의 도망자 생활은 나의 선택이었고, 나를 살아갈 수 있게 해 줬다. 그리고 나를 건강한 마음으로 살게 해 준 많은 작가에게, 그리고 특별히 셜록 홈스에게 뒤늦게나마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인간은 고통 없이 발전할 수 없다. 고통과 고난을 겪으며 인간은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현재를 살아가는 내가 너무 힘들다면, 무조건 숨통을 조이면서까지 버티진 말았으면 좋겠다. 쥐구멍이든, 바늘구멍이든 도망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어떻게든 말이다. 누군가에겐 비겁한 일이라 비판받을지 모르지만, 뭐 어떤가. 내가 그러고 싶으면 그러는 거다. 내 마음을 다독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