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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느무느 Nov 09. 2022

출산 후 처음 옷 산 후기

이런 나라도 옷 잘 입고 싶다

20대 때는 유행하는 스타일의 옷을 자라나 망고 같은 곳에서 꼭 사서 입어보는 편이었다. 코스모폴리탄 같은 패션 잡지도 참고하면서 새로운 패션 트렌드를 접하는 게 재밌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힘 줄 만큼 섬세하진 못 했지만 가장 면적이 넓은 몸뚱어리는 신경이 쓰였다. 그러다 보니 옷 사는 데에는 도가 텄다. 시행착오를 반복해가며 점점 좋아하는 브랜드가 좁혀졌고 옷을 사고 싶으면 단골 브랜드만 확인해 보면 되었다. 옷 좀 사야겠는데 싶으면 먼저 좋아하는 스파 브랜드를 확인해 봤다. 거기 옷들이 마땅치 않으면 백화점에서 잘 가는 매장들을 본다. 그리고 즐겨찾기 해둔 인터넷 쇼핑몰들까지 한번 쫙 훑으면 더 고민할 것도 없었다. 나의 필요와 취향에 부합하는 옷을 높은 확률로 얻을 수 있었다. 온라인으로 주문하더라도 상의, 하의, 원피스마다 내 몸에 맞는 사이즈를 적용해가며 실패 없이 옷을 살 수 있었다.


긴 시간에 걸쳐 내 취향이 정돈되는 와중에 난 어디선가 주워들은 패션 관련 표현에 꽂혀버렸다. 바로 effortlessly chic. 무심한 듯 시크한, 요즘 말로는 꾸안꾸(꾸민 듯 안 꾸민 듯)라는 말과 비슷한 의미다. 힘을 주지 않아도 세련되어 보인다니 얼마나 매력적인가. 난 옷을 잘 입는 사람도 아니고 뭣도 아니지만, 이 표현이 묘사하는 분위기는 너무나 흉내 내고 싶어졌다. 검색 끝에 런던 교외에 사는 영국인 패션 유튜버 Emma라는 분의 열혈 구독자가 되었고 그의 조언에 부합하는 옷들만 내 옷장에서 살아남았다. 내가 파악한 그의 스타일링 포인트는 셔츠나 슬랙스와 같은 기본적인 아이템을 입더라도, 상의를 하의에 느슨하게 넣어 입는 것이었다. 하지만 임신하고 배가 나오니 상의를 넣을 수가 없었다. 넣기는커녕 상의가 배를 지나 가랑이까지 덮는 옷만 입게 되었다. 상의를 하의에 넣을 수 없다면 내 짧은 패션 센스로는 좀처럼 Emma의 시크한 감성을 따라갈 수 없었다. 여러분들도 Pinterest나 Google에 effortlessly chic outfit을 쳐보시길 바란다. 상의를 밖으로 뺀 스타일링이 몇 개나 나오는지 확인할 수 있다. 거의 0에 수렴한다. 임신 중에는 옷 입는 재미가 영 없어서 내내 시무룩했다. 재미가 없는 것 이상으로 개성 없는 ‘그냥’ 임산부로만 보이게 되자 주눅이 들었다.


출산 후에는 육아하느라 사람 만날 일이 거의 없고 패션 피플이 많은 공간으로 놀러 가는 것도 아니니 외출복을 입을 일이 없었다. 대신 집으로 사람들이 왔다. 친구들도 집으로 놀러 오고 시터 선생님도 다 집에서 만난다. 문제는 Emma가 실내복까지 조언해 주지는 않았다는 거다. 목과 무릎이 늘어나고 왜인진 모르겠지만 엉덩이까지 헐렁해진 실내복으로 누군가를 맞을 순 없었다. 그동안 잠옷을 따로 두지 않고 실내복만 밤낮으로 입었더니 많이 해졌던 것 같다. 나도 패션이라는 것과 다시 가까워지고 싶었다. 잊고 있던 옷에 대한 물욕이 슬슬 차올랐다. 당장 손님이 찾아와도 허둥지둥 갈아입을 필요 없는 실내복을 사야겠다 마음먹었다.


대충 확인해 보니 바지는 조거 팬츠가 유행이었다. 트레이닝복으로는 스웨트 셔츠와 스웨트 팬츠를 같이 입는 셋업이 대세였다. 난 조거 팬츠와 스웨트 셋업 둘 다 사기로 결심했다. 내 생일도 다가왔고 그동안 옷을 거의 사지도 않았고 또 한 개만 사서 입으면 옷이 금방 낡을 수도 있으니까. 역시 모든 쇼핑의 시작은 지출에 대한 합리화다. 하지만 예전 습관대로 옷을 고르긴 너무 어려웠다. 약 1년 사이에 무엇이 변한 건지 딱 집어 말하긴 어려웠지만 시중에 파는 트레이닝복조차도 날 위한 옷들이 아닌 것 같았다. 조거 팬츠를 사는데도 몇 날 며칠이 걸리긴 했지만 가장 고민이 되었던 것은 스웨트 셋업이었다. 어느 쇼핑몰을 보아도 평범한 츄리닝이라기 보다는 스트리트 우먼 파이터에 나오는 댄서들이 입을 것 같은 옷이었다. 살짝 크롭 된 맨투맨 상의에 어벙하게 루스한 바지. 내가 과연 이 핏을 소화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고작해야 집 근처 오갈 때 입을 옷 사는 건데 보아하니 젊은이들은 이 옷을 입고 데이트도 하는 모양이었다. 커플룩으로 입는다는 후기도 많았다. 이젠 내가 알던 패션 플랫폼이 아니라 엄마들을 위한, 소위 등원룩을 판매하는 쇼핑몰을 새롭게 알아놔야 하는 걸지도 몰랐다.


쇼핑몰 여기저기를 뒤지고 장바구니에 오래 묵힌 끝에 결국 스웨트 셋업을 샀다. 막상 옷을 받으니 입기 더 쑥스러웠다. 위아래로 같은 재질, 같은 색상인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으니 고등학교 체육복 같기도 하고 단체복을 입고 회사 워크숍에 온 것 같기도 했다. 의외로 남편의 반응은 뜨거웠다. 홍대나 성수동에서 볼 것 같은 대학생 같다고 했다. 거기 근처에도 안 간지 한참 됐으면서. 그러더니 자기도 결국 스웨트 셋업을 사더라. 남편은 밤에 음식물 쓰레기 버리러 갈 때마다 새로 산 스웨트 셋업을 갖춰 입고 나간다. 어두컴컴할 때 나가니 자신감이 더 생기는 건지 모르겠다. 난 아직까지 어색해서 세트로 입고 나가진 못한다. 일단 세트로 입는다는 건 내가 추종하던 패션 이론의 대명제 중 “무심함(effortless)”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그래도 집에서라도 위아래 세트로 입고 있으면 기분은 좋다. 오래간만에 새 옷을 입으니 식탁에서 커피믹스를 마시고 있어도 성수동 바이브가 나는 것 같다. 임신하고 출산해도 여전히 유행하는 옷이 입고 싶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평범한 욕망인데 한동안 잊고 살았더니 인정하기 쑥스럽다.


좌우지간 내 리뷰는요, "키 165에 바지 기장 복숭아뼈까지 오고요, 기모 없는 버전 집에서 입기 부담 없어요. 전반적으로 만족하고 재구매 의사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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