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속도로에 진입해 5분 정도 달리자 마침내 아기들이 잠들었다. 백미러로 힐끔힐끔 뒷좌석 카시트에서 잠든 아기들 얼굴을 확인하며 핸들을 움켜쥔 손에 힘을 살짝 풀었다. 달리는 자동차에 목적지는 없다. 아기들을 충분히 재운 후에 집으로 돌아가는 여정일 뿐. 힘든 하루다.
편하게 꿈나라로 모시기 위해서는 차가 교통 신호에 걸리지 않고 일정한 속도로 계속 달려야 한다. 잠들려는 찰나에 신호에 걸리면 짜증 섞인 울음이 시작된다. 이미 알고 있건만 빨간 불에 아기들의 울음이 터지면 속절없이 손에 땀이 난다. 수없이 본 오래된 공포 영화를 틀어놓고 여전히 오싹해하는 것처럼 다 아는 시퀀스에 마음이 쪼그라든다. 당황하지 말자. 난 이미 결말을 알고 있잖아? 아가들은 언젠가 잠들 것이다. 고속도로 갈 때까지만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 버티자, 아가들아. 버텨줘, 내 멘탈!
지쳐 잠든 아기들을 태우고 고속도로를 달렸다. 일단 잠들고 나면 안심이지만 음악을 틀 수도 없고 팟캐스트를 들을 수도 없다. 자동차나 블랙박스에서 보내는 경고음에 잠이 깰까 조심스럽고, 늦은 오후에 창가로 들어오는 햇살이 아기들 눈을 찌를까 신경 쓰인다. 자동차 엔진 소리와 도로의 백색 소음만 존재하는 시공간에 나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다. 그렇게 1시간은 넘게 달려야 한다. 강제로 사색에 잠겨야 하는 시간이다.
‘2주를 어찌 버틴담.’ 가장 먼저 든 생각이었다. 어린이집 담임 선생님이 2주간 교육에 가시고 대체 선생님이 오셨다. 20개월 쌍둥이 아기들에겐 큰 시련이었다. 어린이집에서 이틀 내내 밥도 거의 못 먹고 울었다고 하더니 결국 삼일째 되는 날에는 집에서부터 울면서 옷 입기를 거부했다. 등원은 바로 포기했지만 아기들의 서러움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밥도 안겨서만 먹으려고 하고 낮잠도 안 자려고 했다. 힘들게 재워도 30분 만에 깨버리더니 또다시 울며 매달렸다. 졸려도 푹 잠들지 못할 정도로 마음이 불안정해진 모양이었다. 어떻게든 재우려고 하는 수 없이 차에 태웠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하루 세 번 집에서 밥을 먹여야 하니 메뉴가 걱정이었다. 아가들이 집에서 코알라처럼 붙어서 떨어지려 하지 않아 요리할 시간도 없었다. 아가들은 매일 자신을 맞아주던 담임 선생님이 사라진 것이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밥도 제대로 먹지 않았다. 근처 반찬가게에서 반찬을 몇 개 사봤지만 아가들의 입맛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런 와중에 내 밥 챙겨 먹는 건 사치였다. 사실 뭐 먹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아기들이 외면한 반찬들을 소진하기 위해 기계적으로 끼니를 해결했다. 오늘 저녁엔 콩자반, 메추리알 조림과 같은 간이 센 밑반찬으로 밥을 먹여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와중에 달고 짠 음식을 주는 게 맘에 걸려 또 괴롭다. 근데 밥을 통 안 먹는 게 괴로우니 어쩔 수 없다. 어째서 이래도 저래도 괴롭기만 한 것인가.
괴롭다 괴롭다 중얼거리다 보니 내일모레로 예약된 정신과 진료가 생각났다. 물론 갈 수 없다. 집에 도착하면 전화해서 진료일을 미뤄야 한다. 문제는 정신과 약이 내일이면 다 떨어진다는 것. 약을 먹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갑자기 하이드가 되어서 피가 낭자한 어떤 사건을 일으키거나 하진 않을 거다. 약 없이 아기들과 부대끼며 스트레스를 소화하느라 마음속으로 눈물을 삼키는 일만 고요히 반복되겠지. 초조해지지 말자고 스스로를 다독이다 잘 안 되자 무의식 중에 입 밖으로 이상한 소리가 나왔다. ‘후어짜! 푸우우…’ 화들짝 놀랐다. 심란해지면 나도 모르게 내는 소리인데 항상 내뱉고 나면 누가 들었을까 봐 부끄럽다. 이런 나를 마주하는 일은 정말 곤욕이다.
더 이상 외계인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정신을 붙들고 위치를 확인했다. 수도권 제1순환고속도로를 타고 한강을 건너 북으로 북으로 가다 보니 남양주, 구리는 진작 지나쳤고 의정부에 다달았다. 아기들이 푹 잠들었으니 이제 시내에서 돌아도 괜찮겠다 싶었다. 차를 돌려 집 근처로 향했다. 양주까지 갈뻔하다가 익숙한 집 근처에 오니 마음이 편하다. 갑자기 오며 가며 도로에서 보던 표지판이 생각났다. ’ㅇㅇ골 전원마을’. 아파트 건너편 한강 가까운 부지로 향하는 길목에 세워져 있던 표지판이었다. ‘오호라, 거기나 한 번 가볼까.’ 고층 아파트가 즐비한 동네에서 전원주택마을이라니 항상 궁금했다. 나는 한 번도 진입해 본 적 없는 도로로 차를 몰았다.
벽돌집도 나오고 시멘트가 노출된 스타일의 집도 보였다. 잘 가꾸어진 나무들이 담장 너머로 보이기도 했다. 속도를 줄이고 핸들에 몸을 기댄 채 고개를 쭉 뺐다. 한 시간 넘게 운전하면서 처음으로 바깥을 구경하느라 눈을 반짝였다. 도로는 넓지 않아 반대쪽에서 차가 오면 나는 한쪽에 차를 대고 상대가 지나가기를 기다려야 했다. 아직 빈 땅도 좀 있었고 조금 더 들어가자 길은 비포장 도로로 바뀌었다. 차가 덜컹거리자 아기들 숨소리가 조금 달라졌다. 좋지 않은 신호다. 이제 그만 구경하고 빠져나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내 앞은 막다른 골목이었다.
후진해서 차를 돌려야 했다. 비포장 도로에 웅덩이가 있었는지 살짝 밟아서는 차가 뒤로 나가지 않았다. 웅덩이를 오르기 위해 엑셀을 세게 밟았다. 차가 후진하며 ‘붕~’ 소리가 나자 아기 한 명이 소리를 냈다. 백미러로 확인하니 눈까지 떴잖아? 주행방향이 갑자기 바뀌니까 잠이 깨버렸나 보다. 대단한 구경거리도 아닌데 여기를 보겠다고 들어와서 아기 잠을 깨우다니, 한심한 놈! 스스로를 모질게 나무라며 아기에게는 다정하게 이야기했다. ‘코 더 자~.’ 하지만 다른 아기 한 명도 눈을 떴다(한심한 놈!). 그래도 눈을 좀 붙여서 그런지 둘 다 울지는 않았다. 다시 잘 기미가 없어 보이자 체념하고 집에서 대기하고 있는 남편에게 문자를 보냈다. ‘둘 다 깸, 10분 뒤 주차장 도착’
10분간 아기상어를 들으며 경쾌하게 주차장에 도착했다. 남편하고 같이 아기들을 안고 집으로 향했다. 긴장한 채로 장시간 운전을 하니 허리가 아프다. 운동을 하면 좀 풀릴텐데. 물론 운동도 취소했다. 아기들과 하루종일 붙어 있으면 운동할 체력이 남아 있지 않을뿐더러 샤워할 시간조차 없으니까. 육퇴 하고 마사지볼로 아픈 부위를 조지는 것만이 최선이다. 이렇게 2주를 어떻게 버틴담. 다시 꼬리에 꼬리를 무는 걱정과 한탄의 시작.
어쨌든 시간은 흘렸고 2주가 지나 담임 선생님은 복귀했다. 등원한 지 하루 만에 둘째가 장염에 걸려 또다시 힘든 일주일을 보내긴 했지만, 그리고 연이어 첫째가 장염을 옮아 하룻밤에 응급실을 두 번이나 가긴 했지만, 그리고 장염 끝에 등원한 지 하루 만에 열감기가 찾아와 3일 동안 열이 펄펄 나긴 했지만. 쓰다 보니 눈물이 난다. 가히 기록에 남을 만큼 하루하루가 고달팠던 한 달이었다. 오늘의 기억이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하는 무기로 탈바꿈하지 않게 마음을 다잡아 본다. 영문도 모르고 담임 선생님을 잃게 된 것도, 고열과 설사, 콧물에 시달리는 것도 전부 아가들이니까 그들이 제일 힘들겠지. 어떻게든 먹이고 재우려는 나의 어설픈 몸부림이 그들에게 작은 위로가 되었기를 바란다. 어차피 기억도 못 하겠지.
아니 근데 기억도 못 하는 거면 어떻게 키웠는지 말은 해줘야 되는 건가? 이건 좀 고민해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