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개월 아가의 말
아기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단어 두 개로 말을 했다. 내용은 주로 아기들이 필요한 것들. “엄마 안아”, “해피(자기 이름) 물”과 같은 식이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표현해 주니 덕분에 의사소통이 꽤나 원활해졌다. 그리고 가끔은 ‘해피 얌말(양말)’ 처럼 니즈와 상관없이 사물을 지칭하는 단어들을 내뱉었다. 이때의 특이점은 두 가지다. 사물과 소유관계에 있는 사람을 먼저 말하고 뒤이어 사물의 이름을 말한다는 것과, 한 번 시작하면 아는 사람을 죄다 가져다가 말한다는 것이다. “해피 얌말, 엄마 얌말, 아빠 얌말, 해피2 얌말” 이렇게 현장에 있는 사람들의 얌말을 모두 언급해 주어야 끝난다. 그리고 나면 ‘해피 바지’로 시작하는 2절을 읊는다.
어느 날은 놀이터에서 해피2가 위 사례를 벗어난 말을 했다. “엄마됴와요.” 아기가 안 쓰던 말을 내뱉어서 남편과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발음도 부정확한 아기가 갑자기 문장을 말한다고? “엄마됴와요”는 도대체 무슨 뜻일까? 미끄럼틀 위에서 나를 향해 한 말이니까 “엄마도 (어서 올라)와요”라고 말하고 싶었던 걸까? 아니, 처음 말하는 문장에 조사까지 완벽하게 쓸 리가 없다. 설마 “엄마 좋아요”라고 말한 건가? 아빠가 아니라 나한테 먼저 좋아한다고 말해주다니 믿기 힘든 가설이었다. 그 이후로 ‘됴아요(좋아요)’로 끝나는 문장들을 말하기 시작하였고 놀이터에서 한 말도 알고 보니 엄마 좋다는 뜻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물론, 좋다는 말보다 진작에 먼저 시작했던 말은 ‘아니'다. 아기 앞에서 언성을 높인 적은 없는데, 아기들은 꼭 화가 나면 누가 알려준 것처럼 버럭 소리를 지른다. 특히 우리 집에서 가장 권위 있는 해피2가 호통치기 시작하면 다들 움찔한다. 해피2가 최고 권위자가 된 이유는 화를 낼 때 발산되는 카리스마가 보통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잘 쓰는 방법은 화의 단계적 분출이다. “아니, 아니, 아아니, 아아니이, 아니이이이이이!!!!” 얼마나 무서운 지는 들어본 사람만 안다. 뒤로 갈수록 높아지는 음성과 강한 제스처에 네 번째 ‘아니’가 나올 때에는 꼼짝없이 미안하다고 사과를 할 수밖에 없다. 쭈굴.
최근에는 세 단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이것도 처음 ‘좋아요’를 말했을 때처럼 충격이었다. 한창 동물 스티커북에 재미를 붙여서 매일 눈만 뜨면 스티커북을 꺼내 오던 때였다. 그림책에서는 못 보던 동물도 많았는데 유독 좋아한 동물은 코알라였다. 어느 날 스티커북 한 페이지를 펼쳐 놓고 빤히 보고 있던 아기가 ‘해피 코알라 조아요’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주어 목적어 서술어가 결합된 완벽한 문장이었다. 그 뒤로 한동안 ‘해피 ㅇㅇ 조아요’ 라고 말하는 문장들이 무한반복 되었다. 해피는 토끼(애착인형)도 좋고 삐아(베개)도 좋고 이모도 좋단다.
여기까지는 귀여운데 어휘가 늘어나자 조금 덜 귀여울 때도 있다. 주+목+술 형식의 문장에서 ‘좋아요’ 다음으로 많이 등장하는 서술어는 유감스럽게도 ‘치워’다. 밥 먹기 싫을 때 ‘해피 빱 치워’라고 한다. 치우라니 처음엔 내가 잘 못 들은 줄 알았다. 생각해 보니 ‘엄마 이것만 치우고 갈게’ 라든가 ‘응가 치우자’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아기들은 기가 막히게 뜻을 알아차리고 쓰기 시작했다. 심지어 엄마도 치우란다. 잠잘 때는 유독 아빠를 찾는데 내가 재워주려고 옆에 누우니 ‘엄마 치워’라는 말로 내 마음을 폭격했다. 그 말에 토라진 척하고 고개를 파묻으면 해피2는 재차 말한다. “엄마 치워~, 엄마 치워~ 엄마 치워어어어어어어어어!!!!” 빨리 사라지란다. 쭈굴.
20개월에 들어서면서 이젠 거의 수다쟁이다. 지시나 지칭, 요구만 하는 게 아니다. 하루 중에 인상적이었던 일들을 재잘재잘 말한다. 어린이집에서 어떤 오빠가 꽈당하고 넘어지는 것을 보고 온 날은 현관을 가리키며 “오빠 아야, 오빠 아야” 하고 말한다. 밖에서 어떤 오빠가 다쳤다는 뜻이다. 미간을 찌푸리며 안쓰러운 표정까지 짓는데, 시간 감각은 없는지 열흘 넘게 ‘오빠 아야’를 말하며 속상해한다. 오빠 이제 다 나아서 안 아프다고 해주면 ‘응’ 하고 대답하고 몇 시간 뒤에 또 오빠 걱정을 한다. 그 정도 되니 오빠가 도대체 얼마나 심하게 아야 했던 건지 나도 걱정된다. 어린이집에서 난생처음 산타 할아버지를 만나고 온 날은 ‘(산타)할부지’를 계속 말했다. 이상하게 생긴 할아버지가 또 올까 봐 무서워서 ‘할부지, 할부지’ 하면서 고개를 좌우로 젓는다. 할아버지 멀리 가서 이제 안 온다고 안심시켜 주면 ‘응’ 하긴 하는데 해가 바뀐 지금까지도 할아버지 무섭다고 말하고 있다.
어느 날은 어린이집에 가기 위해 옷을 갈아입자고 하니 해피2가 ‘안나꼬알라’를 반복해서 말했다. 아무리 들어도 안나꼬알라, 아나코알라라고 밖에 들리지 않아 뜻을 해독하려고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코알라 그려져 있는 옷 입고 싶다구?” 나의 질문에 아기는 손사래만 세게 칠 뿐이었다. 엄마가 자기 말을 못 알아 들어서 그런지 짜증이 섞인 채 크게 외쳤다. “아나꼬알라아아아아!!!!” 아무리 들어도 ‘안나 코알라’라고 밖에 안 들렸던 이 말은 ‘안 할 꼬야’였다. 밥 먹자, 치카 하자, 신발 신자 해도 끝도 없이 ‘아나꼬알라아아’를 외쳐대서 나와 남편은 해피2 별명을 ‘안나 코알라’라고 붙여 버렸다. 단어만 보면 ‘안나(Anna)’라는 영어 이름을 가진 귀여운 코알라인 것 같다. ‘안나’라고 하면 좀 올드하니 이 코알라 이름을 ‘애나’라고 부를 때도 있다. 하지만 이 애나는 입에서 불을 뿜어내며 포효하는,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줄 알았던(하지만 실존하는!) 생명체이다.
서울시 강동구 부근에서 목격되는 안나 코알라 쌍둥이는 안타깝게도 쉽게 만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낯선 사람과 함께 있으면 말을 잘하지 않아서 둘이 가지고 있는 개성을 다른 이에게 널리 알리기 어렵다. 게다가 하루가 다르게 발음이 정확해지고 있어서 트레이드 마크인 ‘안나 꼬알라’ 소리는 조만간 못 들을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소리를 너무 질러대서 흠칫하는데 어느 순간 목소리 크기가 아닌 논리 정연한 말대꾸로 나를 이기려 하고 있으면 더 무섭긴 할 것 같다. 곧 그리워질 해피들의 화법 몇 개를 기록해 둔다.
엄마 맘마 띵동 (엄마 밥 배달 왔다)
해피 발 아야 엄마 약 (해피가 발을 다쳐서 엄마가 약 발라줬다)
엄마 위이이잉 (엄마 머리 드라이 말린다)
아빠 위이이잉 (아빠 면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