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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불시착 김택수 Sep 19. 2019

190911_

by 물꼬기

190911_ 



부고는 늘 슬프다. 슬프고 당혹스럽다. 이만큼을 살았으면 슬프다란 감정엔 분명 내성이 생길 만도 한데. 그럼에도 슬프고, 그럼에도 당혹스럽다. 슬픔이란 감정에 익숙해지지 않는 우리는, 이 감정을 들키지 않으려 애써 연기한다. 괜히 키워보는 텔레비전의 볼륨과 밑 빠진 아재 개그, 실없는 웃음으로. 한 번이라도 더 소리를 내어 침묵을 없애려고 그리하여 살아있음을 얻으려고 그렇게 계속, 말을 건다. 타인에게, 결국은 돌아올 자신에게. 끊임없이 대답을 한다. 


살아있음과 이별하는 일. 나의 이별은 얼마큼 남아있을까, 를 생각하며 길을 건넜다. 하얀 페인트와 까만 아스팔트만큼의 일들이, 내게도 있었는데. 한 발자국 내 디딜 만큼의 시간이 내겐 얼마나 남아있을까. 얼마큼 걸어왔을까. 어느 만큼을 건너가고 있을까. 


기억할 것들이 많다. 남겨두고 간 기억들은 추억이 되고 추억만큼의 그리움을, 아픔을 가진다. 수업시간에 배운 어떤 방정식으로도, 어떤 논리로도 이해되지 않는 감정의 등가교환. 만남은 인생 어느 부분의 교집합일 뿐인데, 나의 프레임에 나오는 등장인물 일 뿐인데 우리는, 그 감정을 쉬이 버리지 못한다. 버리지 못하는 감정의 날것이 두려워 끊임없이 알람을 울려댔다. 공허한 울림은 목적어를 잃어 허공으로 사라졌다. 겨우 붙잡은 자음과 모음을 빌어 다시 되뇐다. 


타인이 아니었던 타인의 죽음과 완벽한 타인의 죽음을 오늘, 전해 들었다. 전자는 나의 친척 할아버지이고 후자는 어느 사진작가이다. 후자를 직접 마주한 적은 없다. 유명하다는 그의 사진과 가짜 세상의 정보와 스쳐 지나가는 이름들. 마주하지 않은 자에 감정이 있을 리 없다. 아-, 그렇구나. 그 사람이 아직, 나와 같은 시간을 살아가던 ‘사람이었었구나’. 누군가의 부재가 그렇게 처리되기도 한다. 


아침부터 엄마의 핸드폰은 시끄럽게 울려댔다. 엄마는 그 소리를 듣지 못한 채 코를 골았고, 나는 무시했다. 늦은 밤에야 전해 들은 아침의 울림은 준비된 마음이라 해도 달갑지 않아, 마지막 모습을 더듬어 보고 있다. 그 헛헛한 마음을 달래려 엄마는 계속 소리를 만들었다. 잔뜩 상기된 목소리로 생각의 단어들을 실체화시키는데만 힘을 썼다. 의미 없는 소리들이 그렇게 유영하고 있다. 잠들지 못하여 뒤척이는 건넛방의 소리를 듣는다. 훤히 밝힌 불만큼의 다짐이 남아있을 것이다. 스스로 소리를 만들어도, 타인에게 혹은 기계에게 소리를 빌어 보아도,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파도처럼 물러났다 다시 찾아 올뿐.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배웅을 해야 한다. 이미 떠난 이와, 나의 지나간 내일과. 이별한다. 


부쩍 가벼워진 바람은 계절을 옮기고 있다. 조금씩 조금씩. 시간이란 프레임이 이별을 옮기고 있다. * 지난 태풍이 만들어낸 피해 뉴스 중, 나의 오래된 지인이 있음을 뒤늦게 전달받았다. 훤칠하고. 영리하고. 멋있었던 젊은이가 그렇게 갔단다. 


남은 자만 힘들겠지,라고. 언니가 중얼거렸다.





by 물꼬기

instagram @mullkogi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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