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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불시착 김택수 Jan 08. 2020

시작은 힘겹지만, 시작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제주도에서 지인을 만났다. 유명한 책방에 들러 인사를 하고 선물로 2020년도 달력을 받았다. 달력은 A3보다 조금 큰 사이즈로 365일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여느 달력과 다른 것이 있었는데, 연간 목표를 쓰고 그 결과를 이루는 날에는 체크를 기록할 수 있도록 각 날짜마다 동그라미가 그려있었다. 일 년의 성과를 되돌아보기 좋은 특이한 달력이었다. 지인과 난 제주의 유명한 카페에 들어갔다. 달력을 꺼내어 보며 자연스럽게 새해의 목표에 대해 이야기했다. 지인은 볼펜을 꺼내 들고 질문을 던진다. "2020년 목표로 할 만한 것이 뭐가 있을까요?" 특별히 계획을 세우지 않아 왔던 나는 그런 가벼운 질문에도 쉽게 답하지 못한다.



 시작의 일이라면 무슨 일을 하더라도 대체적으로 불안했다. 이유는 알기도 하고, 모르기도 한다. 불안을 초래하는 것은 모두 나라는 게 아는 것이고, 나는 왜 불안을 만드는가가 모르는 것이었다. 목표가 주어진 순간부터 선택과 결정의 시간마다 익숙하게 불안했다. 시간이 있으면 그 시간만큼 망설이다 시간이 다 되면 마감의 순간까지 불안해하고, 마감을 넘기면 미안해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최후의, 최후의 순간까지 부탁해야 하고 굽신거리는 순간이 되면 은혜를 입던가 아니면, 아쉬움 가득한 표정으로 포기해야만 했다. 이러한 일들은 왜 반복되는지 그냥 지나온 날들이 빚어낸 성격이라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어린 시절은 변화보다는 안정을 선호했다. 해야 할 것보다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하지 않는 것에 대부분의 에너지를 소비했다. 욕을 하면 안 되고, 싸움하면 안 되고, 술과 담배도 그랬다. 금기. 하지 말 것을 안 하고 가지 말아야 할 곳에 가지 않는 것이 편했다. 삶 자체에 수많은 그리드를 그어놓고, 그 선을 밟지 않고, 넘지 않으며 안심했다. 가능하다면 피했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뭐라도 할 만큼 용기도 없고, 도전을 망설이고, 고지식하며, 변덕이 심하고, 지혜가 부족하고, 계획을 세우지 못한다. 질퍽거리기를 잘하고, 후회도 많고, 할 말을 제때 하는 법이 없어 속이 타들기도 하고, 안 해도 될 말을 해 구설을 만들기도 했다. 속이 좁아 남이 잘되면 심하게 배앓이하면서 그릇이 작아 시도조차도 못하고 억울한 일이 생겨도 말하지 못했다. 있는지 없는지 존재감이 흐린 그런 아이였다. 그렇게 어른이 됐다. 여러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들에게 난 안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못하는 사람이었다. 술도 못하고 담배도 못 하고 싸움도 못 하고 말도 못 하며, 주변에 있지만 없으면 더 좋은, 신경 쓰이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 나이 먹도록 살다 보니 아무리 허접한 인격이라도 끝까지 인내하고 버티는 힘도 모자라 본의와 상관없이 조금씩 바뀌는 경우가 있었다. 그것은 어느 유명 브랜드와의 만남으로부터 시작됐다.  나는 조금씩 아주 조금씩 바뀌게 되었다.


 90년대 초반 논현동 두산 타워 벽면에 거대한 광고판에는 새로운 나이키가 걸려있었다.  당시 나이키는 승리의 여신 니케의 날개를 심벌로 한 세련되고 날렵한 유선 위에 누가 봐도 NIKE란 알파벳이 힘 있게 올라타 있었다. 하지만 새로운 나이키는 그 글자를 과감하게 없애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더할 나위 없는 나이키입니다.라고 말하는 듯이 새로운 나이키는 혁신 그 자체였다. 얼마 후 그 심벌 아래 문장 하나가 더해지는데 그 문구가 바로 'JUST DO IT'이었다. 이 문구 하나가 과거의 나에게 균열을 가져오게 되지만 그땐 아마 몰랐을 것이다. 'JUST DO IT' 그냥 한 번 해봐! 해봐! 해보자! 이 말은 나의 모든 선택과 결정의 순간에 선행하게 되었다. 논산 훈련소의 정문 앞에서, 유학을 떠나는 공항에서, 면접을 보기 위해 도착한 회사 앞에서, 첫 출근, 프러포즈, 결혼식장에서, 아빠가 되었을 때, 두 번째 아빠가 되었을 때도, 나의 모든 역사 속에서 'JUST DO IT'이 있었다. 미래는 여전히 불안하고 새로운 시작도 여전히 어렵다. 이 문제를 해결할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없다. 하지만 나에게는 'JUST DO IT' 이 있다. 99를 망설이다 1을 아무렇지도 않게 "에라 모르겠다." 하며 시작의 첫 단추를 누를 수 있게 된 것이다. 'JUST DO IT' 무거운 첫발을 뗄 수 있는 백만 마력 이상의 엔진과도 같은 마법의 주문이었다.



 2020년 달력을 바라보며 나는 꽤 거창한 목표를 설정해 대답했다. "웃으면서 일어나기! 아침에 잠을 깨면서 웃는 일로 하루를 시작할 거야. 그런 하루는 기록해둘 의미가 충분할 것 같아" 너무 좋은 계획이라며 지인은 웃으면서 일어나기라고 달력에 메모한다. 시작은 힘겹지만, 시작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나의 목표는 언제나 웃으며 시작할 수 있기를 바라며 습관처럼 말해본다  'JUST DO IT'



illru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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