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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불시착 김택수 Jan 11. 2020

오늘도 최선을 다해, 적당히 글 한 줄 써볼까 합니다.



  금장과 블루 어니언의 세밀화로 유명한 일본의 수제 도자기 브랜드 특유의 고풍스러운 잔에 색이 진한 커피가 나왔다. 구부정한 허리를 더 구부려 과장된 동작으로 커피 속을 들여다본다. 본다고 하기보단 온도를 느끼는 것. 온기를 가진 모든 것들은 최고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고유의 온도가 있다고 한다. 70도, 98도니 하는 인간들이 만들어낸 정보를 위한 숫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맛은 모르지만, 온기는 안다. 커피를 바로 눈 아래 갖다 놓고 수직으로 내려다보면 온기가 올라와서 얼굴에 닿는다. 커피를 마시면 맛있다거나 향이 좋다거나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데, 차갑다. 따뜻하다. 뜨겁다는 온도에 관한 말밖에 하지 않는다. 따뜻함. 최상의 따뜻함이 좋기 때문이다. 커피를 마시고, 나만 홀로 남는 건 재미없다. 사실 난 이상하게 다른 생각을 한다. 몸 전체를 곧게 펴고 다이빙하듯 커피 속으로 부드럽게 뛰어든다. 커피의 물결이 잔잔히 일다 멈추면, 나는 유유히 사라지고 온기를 가진 커피만 남아있다. 누구도 짐작하지 못한다. 나와 하나가 된 커피잔은 테이블 위가 원래의 자리였던 것처럼 오래도록 남아있을 것이다. 비밀을 아는 고풍스러운 잔이 태어날 때부터 지녔던 우아한 기지를 발휘하면 누구도 함부로 다루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기포들이 조그맣게 하나둘 올라온다면 내가 아직은 잘 살아 있다는 증거이다. 카페에서 커피 수면위로 두 눈을 극단적으로 가까이 데어 보는 나를 본다면 아마도 그런 상상을 하는 중일 것이다. 






  이제 슬슬 나의 직장으로 가야 할 것 같습니다. 4천 원 정도의 호사를 부렸던 것으로 충분합니다. 나는 책방을 하고 있습니다. 카페가 있는 책방. 그러나 사람들에게는 책방이 있는 카페로 더 알려져 있습니다. 책방은 언제나 가난합니다. 먹을 것도 없습니다. 그래도 카페는 책방보다 조금 나은 편이라 언제라도 커피를 마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난 가끔 아주 가끔 호사를 부리기 위해 길 건너 카페에 갑니다. 가구와 찻잔에 아낌없이 돈을 들인 흔적이 묻어나는 카페에서 가장 저렴한 커피와 온기와 상상을 즐기는 이상한 사람입니다.



  우리 카페에도 이상한 손님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캐러멜 마키아토가 맛있다고 찾아오는 중년의 여자 손님입니다. 늘 캐러멜 마키아토를 마십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내가 내리는 마키아토가 너무 맛이 좋아 다른 알바가 근무할 때에는 다른 음료를 주문한다고 합니다. 불행히도 난 캐러멜 마키아토를 먹어본 적이 없고 왜 내가 내린 그것이 맛있는지 이유도 모릅니다. 그 이유도 나중에 물어봐 알았는데 내가 내려주는 마키아토의 무게감부터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사실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날은 둘이 왔습니다. 딸과 같이 왔는데 그 딸과도 가볍게 아는 사이라 인사를 했지만, 그들이 모녀인지는 몰랐습니다. 역시 캐러멜 마키아토를 주문을 받았습니다. 조금 신경 써서 우유 스팀을 하고 커피에 올리기까지 완벽했는데 드리즐을 하다 그만 캐러멜 소스 뚜껑이 열려 캐러멜 한 덩어리가 풍덩 하고 말았습니다. '망했다.' 조심스럽게 용기 주변만 닦아 모른 척하고 드릴까도 했지만, 다시 했습니다. 이번엔 별문제 없이 잘 됐습니다. 난 두 개의 커피잔을 건네며 망친 것을 표시해드리고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모녀는 행운이라며 외출 중에 사 온 마카롱을 건네주었습니다. 나에게 성공이란 의미가 크거나 높거나 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 마카롱 하나가 성공입니다. 오랜만에 괜찮은 그림을 그렸을 때, 피천득의 글이 좋다고 하는 손님을 만났을 때, 라테의 스팀 아트가 좋은 모양으로 자리를 잡을 때도 기분이 좋습니다. 고요한 책방의 책들은 낮잠을 자는 것 같습니다. 오후가 되면 커다란 창을 통해 사선으로 들어오는 빛은 잠자던 책들을 다독입니다. 잠든 아이의 배를 쓰다듬는 따스한 엄머니의 손길 같습니다. 그런 광경을 매일 보고 있으니 괜찮지 않다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을까요. 말라 비틀어 저가는 허브의 밑바닥에 아주 조그만 생명의 초록을 발견했을 때도 그렇습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둘러보는 나의 하루에는 성공이 흔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반대로 지긋지긋한 실패도 많습니다. 책방으로 생활이 되냐며 바라지도 않은 동정만 남기고 가는 손님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책을 살 마음의 여유가 없는 사람입니다. 겨우 책 한 권을 팔고 마감을 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집에 돌아가 아이들 볼 면목이 없습니다. 집안 기둥에 싸가지가 있으면 가문의 삼족에 우환이 따라다닌다는 가훈을 달아놓았는지 카페에 들어올 때부터 무 매너가 극에 달아 온 손님도 있습니다. 그럴 땐 지극정성으로 맛없는 커피가 만들어지기를 바라며 애꿎은 그라인더를 툭툭 쳐 시비를 걸어보기도 합니다. 이런 것들은 실패일 것입니다. 책방과 카페 일이라는 것이 십수 조를 움직이는 국책사업도 아니고, 사소한 사건 하나로 나락으로 떨어지는 연예계도 아니고, 피와 땀과 눈물로 얼룩진 치열한 승부사의 세계도 아닙니다. 그런 세계와는 너무나도 멀리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는 생각조차 듭니다. 용기와 노력 같은 마음의 준비가 무의미할 정도 가볍고 이상할 만큼 사소한 것에 성공과 실패를 따지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토록 사소한 것에 반해 책방을 오래오래 하고 싶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시간을 접어두고 수다를 떨다가 막차를 탈 수 있을까, 없을까 같은 승부는 즐거울 따름입니다. 오늘도 최선을 다해, 적당히 글 한 줄 써볼까 합니다.




죠-타이거

instagram @illruwa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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