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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불시착 김택수 Feb 07. 2020

스타브르 캔 고등어

 머리를 감습니다. 머리를 감을 때마다 몸에서 분리된 머리칼 한 올 한 올이 모여 물흐름을 막습니다. 배수구가 막히면 물이 차오릅니다. 난 이런 상황을 아주 아주 싫어합니다. 탈모가 아쉬운 것이 아니라 물의 흐름이 막히는 것에 대해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기도 합니다. 




 책방에는 약 천권의 책이 있습니다. 아무 때나 이 책들을 읽어 볼 수 있습니다. 책과 컴퓨터를 옆에 두고 스마트 폰을 만지작거립니다. 카페에는 다양한 종류의 메뉴가 있습니다. 얼마든 커피를 마실 수 있지만, 마시지 않습니다. 뜯어 놓은 새우깡의 양이 줄지 않습니다. 결렬하게 역류성 식도염이 올라와 얼굴이 크게 일그러집니다. 오늘 유난히 조명이 차갑습니다. 손님의 체온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외투를 꺼내 입을까도 생각해봤지만 귀찮습니다. "넌 나에게 매일 첫사랑" 에피톤 프로젝트의 노래가 흐릅니다. 평소라면 가장 편애하는 음악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오늘은 집중하지 못합니다. 이런 날의 선곡은 어떤 곡도 실패할 확률이 높습니다. 신인류와 이랑도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냉장고와 모니터의 펜 소음이 거슬립니다. 어제 잠을 자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이라도 소파에 누워 눈을 감을 수 있습니다. 피로한 눈커플을 감싸줄 수면 안대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소파로 가지 못합니다. 얼마 못 가 다시 모니터 앞으로 돌아올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책방이 왜 이리 조용하지 못한지. 책방이 왜 이리 따뜻하지 못한지. 나는 몇 개의 할 일을 미루고 모니터 앞에 앉아 눈을 감았다가, 스마트 폰을 봤다가, 다시 모니터에 유튜브 화면을 뒤적거리다가 다시 눈을 감아봅니다. 



 약간 짜증이 나 있기 때문입니다. 왜 짜증이 났는가? 이유를 알기 어렵습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해야 할 일을 떠올려봅니다. 그림을 그려야 할 것 같고, 글을 써둬야 할 것 같고, 영화도 보고 싶습니다. 책도 읽고 싶고, 몇 가지 문구 디자인도 해야 합니다. 책방의 스케줄을 짜야 하고, 북센의 예치금 문제도 해결해야 합니다. 내일 할 일은 내일 생각해 보려 하지만 그것도 쉽지 않습니다. 뒤죽박죽. 지금이 딱 그런 상황입니다. 그러다 보니 안절부절못하지 못하는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날은 어느 하나만 해도 괜찮을 것입니다. 해서 난 오늘 하루에 대해 글로 써보기로 해 봅니다. 아침에 본 배수구가 생각이 떠오르는 바람에 예상대로 글이 나아가지 못합니다. 엽서에 필요한 비닐을 사지 못했고, 잉크를 사지 못했고, 예치금을 처리하지 못했고, 처음으로 구매한 중고 사이트의 마이크는 불량이었습니다. 읽는 책은 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고, 무릎이 약간 시렸습니다. 약속은 깨지고, 글쓰기 모임은 취소됐습니다. 책은 한 권도 판매하지 못했습니다. 종로에서 고잉메리라는 새로운 편의점은 신선했습니다. 따낸 큰돈을 썼지만 아쉽지 않았습니다. 그곳에서 구매한 스타브르 캔 고등어 Stabbur-Makrell 는 생김새가 너무나 예뻤습니다. 납작한 통조림은 고등어, 토마토와 바질 일러스트가 있고 압도적으로 눈에 띄는 기분 좋은 노란색으로 디자인 돼 있습니다. 어느 빈티지 가게에서 예쁜 틴케이스의 유혹에 빠져들 듯, 추억의 장난감 소품을 고르는 것처럼 구매를 결심했습니다. 물론 내용물을 확인할 계획은 없습니다. 무엇이 들어있는지 궁금하지도 않습니다. 단지 기분 좋은 디자인에 반한 것뿐입니다. 어느 날 서가에 무심한 듯 올려놓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글을 쓰다 말고 고등어 캔을 가져와 모니터 앞에 올려놓았습니다. 그제야 기분이 약간 나아졌습니다.












 죠-타이거

instagram @illruwa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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