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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불시착 김택수 Feb 20. 2020

어떤 취미

 나의 취미는 독서가 아니다. 영화도 아니고, 쇼핑도 아니다. 여행도 아니다. 글, 그림, 사진, 티브이 보기, 멍 때리기, 잠자기, 정리하기. 취미라 하기에는 다 너무 좋지 아니한가. 이런 것들이 취미라면 난 일말의 고민도 없이 대답할 수 있겠다. 나의 독서와 그림, 글쓰기, 사진은 어딘가 필사적이고, 영화와 쇼핑에 드는 시간은 너무나 제한적이다. 나는 혼자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예약도 계획도 없이 무작정에 의존하는 타입이라 여행은 도무지 취미로 할 수 없다. 그것은 고난에 가깝다. 그렇다면 유튜브를 보거나 멍 때리기, 잠자기가 남는데 이것들을 취미라고 하기에는 부끄러워 은밀한 취미로 남겨둬야겠다. 설마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더라도 굳이 "아닌데요!"라고 버럭 성질을 부려볼 생각이다. 오늘은 출근해 모빌을 만들고 있었다. 데칼코마니 그림을 출력해 가위로 오리고 반으로 접어 풀칠하고 낚싯줄로 꽤 메면 끝나는 간단한 공정이다. 제법 신나게 만들고 있는데 손님이 말을 걸어왔다.

 예쁘네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런 거 만들고 있으면 아내분이 좋아해요?

 아.......  예전에는 좋아했는데......

 나는 말끝을 흐리며 어색한 미소로 대답을 마무리했다. 돈이 안 되고, 취미라 하기에도 적극성이 부족하고, 좋아서 한다고 해야 맞지만, 지금 이 상황에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하는가? 취미를 갖기에도 좋아하는 일을 하기에도 처한 상황이라는 것이 자신을 스스로 우습게 만든다. 그렇게 현실적인 물음 앞에서 나는 자꾸만 도망갈 구멍만 찾는 것이다. 더 모빌을 만들 기분이 나지 않아 적당히 마무리했다. 사정이 그러하니 그리기와 만들기는 더욱더 취미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오전에 책을 찾다가 도저히 찾을 수 없어 포기하고 말았다. 난 물끄러미 서가를 바라본다. 엄밀한 의미로 서가라고 책방 서가라고 말하기에는 터무니없을 만큼 부족하고, 개성도 개연성도 없다. 책 한두 권을 집어 자리를 잡는다는 가벼운 생각이었는데 책 무더기를 옮기다 그만 책장 자리를 옮긴다. 결국, 서가 구성을 달리하게 되고 말았다. 책을 운반하는 일은 폭발적인 에너지가 필요하다. 결국 대충 오늘은 여기까지 하는 마음이 움직여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서킷브레이커가 발동돼버렸다. 정말 고되다. 이렇게 힘들이는 정리 역시 취미로 할 일은 아니었다.


 어제는 나의 책방 친구들과 수카라라는 유명한 비건 맛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나는 비건이 아니고 맛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할 정도로 발달한 혀도 없다. 수카라를 나와 누가 어디로 라고 할 것 없이 무심코 걸었다. 오후의 햇살은 푸근했다. 와우산로를 조금 오르니 번화가로만 알고 있던 홍대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츄릅츄릅츄릅 하는 새소리가 들리고 고양이 발소리에 귀를 기울일 정도로 조용한 마을이었다. 마을버스가 지나갈 때마다 부웅하는 소리가 났다가 사라졌다. 지난밤 눈이 내렸다. 비탈진 경사로에 뿌려진 염화칼슘이 고슬고슬 굴러다니고, 채 녹지 못한 살얼음과 처마 끝에 내린 고드름이 햇빛에 반짝거리고 있었다. 산허리와 지붕은 제법 눈이 쌓여있다. 갑자기 소란스러워 뒤를 돌아보니 해민과 창필이 눈싸움을 하고 있었다. 고양이를 보고 사진을 찍고 고드름을 따기도 했다. 일행은 와우산을 넘어 창전동을 지나 상수까지 걸었다. 창필과 수연은 군산으로 여행을 간다고 했고, 해민은 근처에서 볼일이 있다 했다. 수잔은 아마 순심이 전시하는 세종문화회관으로 갈 것 같다. 나는 상수에서 6호선을 탔다. 이태원 어디쯤에서 졸았고, 안암 어디쯤에서 책을 읽었다. 어느 독립영화 같은 한나절이었다. 그저 좋았다. 그냥 함께 멍하니 보내도 아깝지 않은 시간. 나의 취미는 아마도 이들인가 보다.






죠-타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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