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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불시착 김택수 Feb 16. 2020

레몬맛 푸딩(2) 오분자기

붉은달


11월의 마지막 날, 나는 할 일이 너무 없어 친구에게 문자를 보냈다. 한가하면 만나자고 할 작정이었다. 

오늘 저녁에 뭐하니? 

나 할 일 많다ㅋㅋ 너무나도 싱거운 답변.

바로 그 날, 누군가 곁에 있어 줄 사람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누군가 나를 슬프게 하지도 않았고, 평화로운 나날이 계속되던 때였다. 그러던 중, 외로움은 나를 불시에 덮쳤다. 외로울 때면 일기를 쓰거나 책을 읽거나 쇼핑을 하는데 그러고 있으면 외로움은 쉽게 잦아들었다. 하지만 그 날은 독서, 쇼핑, 글쓰기의 삼종세트도 아무 소용없었다. 오랜 시간 갈고 닦아온 혼자 있기의 기술도 때로는 쓸모 없어지는 법이다. 돈으로 누군가 내 곁에 있는 시간을 사고 싶을 정도였다. 

우울한 음악이나 들으면서 침대 위에 멍하니 누워있다가 배가 고파 벌떡 일어났다. 오후 두 시 부터 낮잠을 자기 시작했는데 창가를 보니 밖은 어두워져 있었다.  대여섯시쯤 된 듯 했다. 낮에 설탕이 많이 든 음료를 마셔서인지 배가 고프지 않았다. 그래도 내 몸에 대한 의무감으로 조금은 저녁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는 까페에 가서 스콘이나 한 조각 먹어야지. 당근 스콘이 나을까, 아니면 블루베리 스콘이 나을까. 아니면 버터향이 듬뿍 배인 플레인 스콘? 고민하며 까페에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 직원이 기계적인 멘트로 맞아주었다. 스콘은 어떤 맛으로 하시겠어요? 당근 스콘을 주문했다. 당근 스콘에 어울리는 음료는 카모마일 티. 당근의 오렌지색과 카모마일 티의 샛노랑 색은 잘 어울리니까. 

조금 있으니 진동벨이 울렸고, 당근 스콘과 카모마일 차를 가지고 자리로 왔다. 쟁반을 놓는 순간, 나무 탁자의 갈라진 틈새에 꽂혀있는 전단지를 발견했다. 나는 어느 새 전단지를 펴들고 있었다. 단숨에 전단지를 읽었다.

5분, 안아드립니다, 5만원

때로 가까운 사람이 우리 곁에 있어주지 못할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가까운 사람이 곁에 있어줄 때에도 우리는 그들에게 안아달라 청하기

어.렵.습.니.다.

바로 그럴 때 당신을 안아줄 수 있는 오분자기 서비쓰으

누군가 나를 시간을 정하고 안아줄 때의 기분이 궁금해졌고, 낯선 이와의 포옹에서 얼만큼의 만족감을 얻을 수 있을지, 궁금했다. 외로웠던 그 날의 나는, 전단지의 번호로 전화를 걸어보기로 했다. 

뚜루루루루  뚜루루루루룰 뚜비루비루비루비둡둡

이상한 신호음이었다. 뚜비루비루비루비둡둡 이라니. 

딸깍. 네, 오분자기 서어비이쓰으 입니다아~

저어기, 5분 이용하려고 하는데요, 이게 출장 서비스인가요?

아 네, 출장도 되구요오, 아니면 지익접 찾아오셔두 되요오~

뭐라고 말할지 생각하는 동안 흘러갔던 몇 초간의 침묵이 흘렀다. 그러자 사근사근한 목소리가 나에게 되물었다. 

처어음 이용하시는 거언가요오? 보토옹은 처음 이용하실 때엔 공원으로 많이들 부르시죠오. 오픈된 장소니까요. 

오픈된 장소니까요. 단숨에 안심이 됐다. 밤 10시, H공원의 느티나무 밑에서 만나기로 했다. 계좌로 입금을 하고, 밤 9시 45분에 까페를 나섰다. 변태같이 생긴 남자가 나오면 어떡하지? 아니면 내 전 남자친구를 닮은 사람이 나오면 어떡하지? 이런 쓸데없는 걱정을 하며 공원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뎠다. 다행히 그는 변태같지도 않고, 전 남자친구를 닮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특별한 일을 할 만큼 특별하게 생긴 사람도 아니었다. 평범한 얼굴의 사내가 내 앞에 서있었다. 

K 씨...맞으시죠?

네...

여기 싸인해 주시고요...

그는 오후 10시라고 쓰인 계약서 같이 생긴 종이를 내밀고 싸인을 하라 했다. 택배받을 때랑 비슷하잖아. 그는 스탑워치를 꺼냈다. 마치 이 일을 위해, 이 의식을 위해 태어난 듯한 그런 스탑워치. 그 스탑워치는 둥근 손거울 모양에, 큼지막한 눈금 5개가 정확한 간격으로 그려져 있었다. 

켁켁 켈렉켈렉

11월의 한 밤, 찬 공기 때문에 기침이 저절로 나왔다.  갑자기, 나를 둘러싼 공기가 훅 덥혀졌다. 내 코가 어느 새 그의 앙고라 스웨터에 묻혀있었다. 그는 입고 있던 큼지막한 외투의 단추를 풀어 내 등까지 감싸안았다. 나는 캥거루 어미 안에 든 새끼마냥 품에 파묻혀 있었다. 낯선 사람의 품이 이토록 편하다니. 놀라웠다. 그는 그 직업에 최적화 된 사람이었다. 시간을 멈추고 싶었다. 문득,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는지 궁금해졌다. 1분이 지났을까. 2분이 지났을까. 그의 품에 안겨있으니 시간을 확인할 수 없었다. 처음에 품에 안겼을 때는 달콤한 향이 났다. 그 향은 코끝에서 점점 무뎌져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궁금해졌다. 나의 외로움도 이 향기처럼 점차 무뎌져 결국은 느낄 수 없는, 그런 순간이 올까. 

하지만 알고 있었다. 그런 순간은 오지 않으리라는 걸. 외로움은 마치 자라나는 손톱과 같아 깎고 깎아도 자라나는 걸. 달이 보름달에서 그믐달이 될 때 깎여만 가도, 결국에는 조금씩 통통해져 다시 보름달이 되는 걸. 그렇게 외로움은 깎여만 가도 결국에는 조금씩 통통해져서 내 마음에 묵직하게 자리잡는 걸. 

지잉. 진동이 울렸다. 그는 말했다. 

1분...정도 남았네요.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시간이 다 되었어요. 그럼 이만...

따뜻한 코트를 주섬주섬 여미던 그는, 기계적인 미소를 띄며 걸어갔다. 그의 모습이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깨달았다. 내가 걸었던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어, 다시 이 서비스를 신청해도 그를 볼 수는 없겠구나. 그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아까 그 사람 말고 다른 누군가 안아줘도 느낌은 똑같을까? 이 질문에 내 안의 또다른 내가 대답했다. 

"똑같지 않을거야. 칵테일 바에 갔다고 쳐봐. 넌 위스키도 고를 수 있고, 브랜디도 고를 수 있고, 아니면 발렌타인 17년산을 고를 수도 있어. 맥주나 와인을 주문할 수도 있고. 그 모든 술의 맛이 다 다를테지만 취하는 건 똑같잖아. 취하면 됐지 뭐하려 맛까지 따져?" 

그래, 맞다. 다음 포옹의 맛은 어떨지 예상할 수 없었지만, 그에 취하게 될 것은 분명했다. 그럼 됐지 뭐. 기계 부속품이 수명을 다 하면 대체할 수 있듯이, 나를 안아주었던 누군가도 다른 누군가로 대체하면 되지 뭐.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오분자기 서비스는 이용할 수 있을텐데.

시계를 보았다. 새벽 1시였다. 느티나무 아래서 만난 그가 떠난 후 혼자 멍하니 서 있었던 시간이 꽤 길었는지 시간은 훌쩍 가 있었다.  

얼어붙은 손을 호호 불며 집으로 돌아왔다. 새벽 한 시 반이었다. 





붉은달

instagram @red_moon_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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