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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불시착 김택수 Sep 01. 2020

만년필

간지의 시간



 서른을 지날 무렵 가난은 모든 물욕에서 포기를 알게 해 주었다. 그런데도 눈에 밟히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하나는 손목시계이고 다른 하나는 만년필이었다. 예전에 어느 잡지에서 남자는 만년필과 시계 그리고 벨트 구두에 반드시 한 번쯤 미친다는 기사를 봤었다. 나는 조심스러웠으나 남자가 되어가는 것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벨트와 구두까지 욕심이 날 정도로 중증은 아니었는가 보다.


 만년필은 서른셋 생일 와이프의 선물이었다. 초록의 마블링과 금장이 어우러진 파이롯트만년필이었다. 보급형 만년필은 누가 봐도 고급은 아니었다. 하지만 난 기뻐서 춤이라도 출 정도였다. 내가 가지고 싶었던 만년필은 고급이어야만 할 이유가 딱히 없었기 때문이다. 그냥 만년필이면 되는 것이었다. 재킷의 안 주머니에서 금빛 만년필을 꺼내어 계약서를 살짝 들여다본 후 자연스럽고 거침없이 서명란에 사인한다. 그 손은 왼손이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다시 재킷의 포켓 자리로 돌아가는 짧고 강렬한  만년필의 활약은 신뢰의 기본이다. 난 빌 클린턴이 계약서에 서명하는 동영상을 몇 번이고 돌려 본 적이 있다. 여유는 미소에서, 신뢰는 만년필에서, 간지는 왼손이라 생각했다. 만년필에 대한 탐욕은 아마 그 동영상을 본 이후였던 것 같다. 여유 있는 미소는 잘생긴 클린턴을 넘을 수 없고, 왼손은 그냥 딸린 장식품인 나에게 그럴싸한 만년필이라도 있었으면 했다. 그리고 계약서의 서명은 그냥 상상 속에서 즐기면 되는 것이었다. 이유는 나와 같지 않더라도 만년필에 대한 집착은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춤추게 했던 초록 마블링 금장 만년필은 지금, 어느 서랍 아니면 필통 역활을 대신하는 통에 잠들어 있을 것으로 짐작한다. 꺼내어 본 지 오래되었다. 그림을 그리거나 노트 필기를 하더라도 그것은 연필과 볼펜보다도 편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잉크가 굳어 사용할 수도 없을 것이다. made in japan인 파이롯트 만년필은 잉크 카트리지가 한국산과 다르다는 것을 종각에 있는 파이롯트 매장에 가서 알려주었다. 한국에서는 리필잉크를 구하지 못해 일본에 있는 친구에게 부탁해야만 했다. 친구가 보낸 리필 잉크도 어딘가에 잠들어 있을 테지만 그것까지 찾아낼 자신이 없다. 그리고 10년 전쯤 또 하나의 만년필을 산 적이 있다. 무인양품의 무적 간지 실버 만년필이다. 무인양품 디자인의 인기 요인은 빼기로 요약할 수 있었다. 최대한 '심플하게'를 위해 버려야 하는 것을 무인양품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제품은 잉크 탱크가 너무 작은 문제가 있었다. 너무 뺀 나머지 필기구에 필을 빼버렸다. 무적 간지 실버 만년필도 어딘가에서 잠들고 있다. 


 세월은 많은 것을 바꿔 놓는다. 나와 만년필의 시대는 이렇게 저물어간다. 지금은 그림 그리기 위한 도구로 코픽펜을 주로 사용한다. 마카로니 웨스턴의 클린트 위스트우드가 속사 총을 사용하는 것처럼 나의 바지 오른 주머니에서 항상 대기 중이다. 간지와 실용의 시간에서 후자의 시간을 택했다. 지금이 그렇다는 것이다. 나는 또다시 잠들어 있던 만년필을 꺼낼 수도 있다. 그것들이 내 주변 여기저기서 굴러다닐 수도 있다. 그때는 다시 간지의 시간이 됐다는 뜻이다. 





김택수

instagram@illruwa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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