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지의 시간
춤추게 했던 초록 마블링 금장 만년필은 지금, 어느 서랍 아니면 필통 역활을 대신하는 통에 잠들어 있을 것으로 짐작한다. 꺼내어 본 지 오래되었다. 그림을 그리거나 노트 필기를 하더라도 그것은 연필과 볼펜보다도 편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잉크가 굳어 사용할 수도 없을 것이다. made in japan인 파이롯트 만년필은 잉크 카트리지가 한국산과 다르다는 것을 종각에 있는 파이롯트 매장에 가서 알려주었다. 한국에서는 리필잉크를 구하지 못해 일본에 있는 친구에게 부탁해야만 했다. 친구가 보낸 리필 잉크도 어딘가에 잠들어 있을 테지만 그것까지 찾아낼 자신이 없다. 그리고 10년 전쯤 또 하나의 만년필을 산 적이 있다. 무인양품의 무적 간지 실버 만년필이다. 무인양품 디자인의 인기 요인은 빼기로 요약할 수 있었다. 최대한 '심플하게'를 위해 버려야 하는 것을 무인양품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제품은 잉크 탱크가 너무 작은 문제가 있었다. 너무 뺀 나머지 필기구에 필을 빼버렸다. 무적 간지 실버 만년필도 어딘가에서 잠들고 있다.
세월은 많은 것을 바꿔 놓는다. 나와 만년필의 시대는 이렇게 저물어간다. 지금은 그림 그리기 위한 도구로 코픽펜을 주로 사용한다. 마카로니 웨스턴의 클린트 위스트우드가 속사 총을 사용하는 것처럼 나의 바지 오른 주머니에서 항상 대기 중이다. 간지와 실용의 시간에서 후자의 시간을 택했다. 지금이 그렇다는 것이다. 나는 또다시 잠들어 있던 만년필을 꺼낼 수도 있다. 그것들이 내 주변 여기저기서 굴러다닐 수도 있다. 그때는 다시 간지의 시간이 됐다는 뜻이다.
김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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