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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불시착 김택수 Sep 01. 2020

아베크롬비 점퍼

by 수연

 소비의 순간은 기쁘지만 주로 오래 가지는 못한다. 나는 물건을 사지 않는다고 하는데 방은 항상 더럽다. 정리할 공간이 없다. 버린지 얼마 안됐는데 다시 버릴게 한 바가지가 된다. 왜지? 여튼 그 방을 어지럽히는 물건의 대부분이 옷이다. 옷이 정말 많은데 이상하게 입을 것이 없고.. 대충 입고 나갈래도 엄청 오래 걸린다. 그래서 어차피 옷이 많을 것이라면 중고를 입자는 생각을 하며, 중고 옷을 쫓기 시작한 지 꽤 되었다. 옷을 입어보고 사기가 좀 더 힘들어서 실패도 많았다. 그래서 못 입는 옷이 더 쌓이며 후회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흙 속의 진주같은 옷이 있다. 작년 가을 동묘에서 산 아베크롬비 점퍼이다. 짙은 갈색의, 아주 두텁고, 약간 해진 티가 있으며 목부분에 지퍼는 있지만 모자는 없다. 길이는 골반정도. 마지막으로 가격은, 2만원! 나는 보자마자 그 옷과 사랑에 빠졌다. 걸쳐보는데 너무나 두근거렸고 쇼핑백에 담아 집에 가져가 세탁, 마르기를 기다리는데도 너무 두근거렸다.. 얼른 추워지길 기도하며 그 옷을 처음 입고 알바에 가는데! 내가 멋있는 카우보이가 된 것 처럼 느껴졌다.


 왜냐면 그 옷과 사랑에 빠진 이유는 , 그 옷이 [브로크백 마운틴] 의 에니스의 옷 같았기 때문이다. 처음 봤을때는 그 옷 자체인 것 같았는데 막상 집에서 검색해보니 색깔 빼고는 별로 안 닮긴 했다. 그래도 그 옷은 에니스의 것이다. [브로크백 마운틴]은 한창 감성적인 중학생의 마음에 크게 자리잡았었고, 취향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나는 그 영화와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를 연달아 본 뒤로 갈색, 바랜 초록색, 모자, 낡은 것 등의 물건들에 큰 애정을 느꼈다. 그런 내가 성인이 되어 노력 없이 우연히 발견한 그 아베크롬비 점퍼는 정말 보물같은 물건이었다. 작년 가을, 겨울, 올 초봄까지 그 점퍼는 항상 나와 함께였다. 그 점퍼를 입고 가을에는 안동, 겨울에는 순천에 다녀왔다. 점퍼와 함께 낙엽길과 겨울 산길을 걷는 경험이 참 영화같이 느껴졌다. 그 옷과 함께한 추억을 떠올리며 웃고, 여름 해가 짧아지는 것을 실감하며 얼른 날이 차가워지길 기쁘게 바란다. 얼른 에니스의 점퍼에 내 몸을 담고 싶다. 물건이 선사하는 행복이 이렇게 크다.





by 수연

instagram @yoridogjoripu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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