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수연
소비의 순간은 기쁘지만 주로 오래 가지는 못한다. 나는 물건을 사지 않는다고 하는데 방은 항상 더럽다. 정리할 공간이 없다. 버린지 얼마 안됐는데 다시 버릴게 한 바가지가 된다. 왜지? 여튼 그 방을 어지럽히는 물건의 대부분이 옷이다. 옷이 정말 많은데 이상하게 입을 것이 없고.. 대충 입고 나갈래도 엄청 오래 걸린다. 그래서 어차피 옷이 많을 것이라면 중고를 입자는 생각을 하며, 중고 옷을 쫓기 시작한 지 꽤 되었다. 옷을 입어보고 사기가 좀 더 힘들어서 실패도 많았다. 그래서 못 입는 옷이 더 쌓이며 후회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흙 속의 진주같은 옷이 있다. 작년 가을 동묘에서 산 아베크롬비 점퍼이다. 짙은 갈색의, 아주 두텁고, 약간 해진 티가 있으며 목부분에 지퍼는 있지만 모자는 없다. 길이는 골반정도. 마지막으로 가격은, 2만원! 나는 보자마자 그 옷과 사랑에 빠졌다. 걸쳐보는데 너무나 두근거렸고 쇼핑백에 담아 집에 가져가 세탁, 마르기를 기다리는데도 너무 두근거렸다.. 얼른 추워지길 기도하며 그 옷을 처음 입고 알바에 가는데! 내가 멋있는 카우보이가 된 것 처럼 느껴졌다.
왜냐면 그 옷과 사랑에 빠진 이유는 , 그 옷이 [브로크백 마운틴] 의 에니스의 옷 같았기 때문이다. 처음 봤을때는 그 옷 자체인 것 같았는데 막상 집에서 검색해보니 색깔 빼고는 별로 안 닮긴 했다. 그래도 그 옷은 에니스의 것이다. [브로크백 마운틴]은 한창 감성적인 중학생의 마음에 크게 자리잡았었고, 취향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나는 그 영화와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를 연달아 본 뒤로 갈색, 바랜 초록색, 모자, 낡은 것 등의 물건들에 큰 애정을 느꼈다. 그런 내가 성인이 되어 노력 없이 우연히 발견한 그 아베크롬비 점퍼는 정말 보물같은 물건이었다. 작년 가을, 겨울, 올 초봄까지 그 점퍼는 항상 나와 함께였다. 그 점퍼를 입고 가을에는 안동, 겨울에는 순천에 다녀왔다. 점퍼와 함께 낙엽길과 겨울 산길을 걷는 경험이 참 영화같이 느껴졌다. 그 옷과 함께한 추억을 떠올리며 웃고, 여름 해가 짧아지는 것을 실감하며 얼른 날이 차가워지길 기쁘게 바란다. 얼른 에니스의 점퍼에 내 몸을 담고 싶다. 물건이 선사하는 행복이 이렇게 크다.
by 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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