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택돌
오늘 주제로 살아 온 날들의 기적에 대하여 쓰기로 했다. 말하고 나서 아차 했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바둑이나 장기처럼 한 수 무르기가 적용된다면 다른 주제로 정할 것이다. 그래야만 했다. 기적이라니 얼마나 올드한가. 내 삶의 부끄러움을 온통 드러내야 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굉장히 낯설다. 12명의 사람이 나를 보고 있다. 그들의 목적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글쓰기를 위해 또는 책을 만들기 위해, 글쓰기 강좌로 알고 오신 분도 있을 것이다. 몇 명은 실망할 수도 있다. 안타깝게도 나에게는 글을 가르칠 문학적 소양이 없다. 도서관은 유명 작가를 초청해 글쓰기 노하우를 제공할 수 있다. 참가자들은 작가의 아웃풋을 흡수할 준비를 하고 온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라는 것일지도 모른다. 눈빛이 다부지다. 그런 눈빛에 나는 주눅이 든다. 책방에서는 체험을 통한 글쓰기가 일반적이다. 소설, 시, 에세이 장르를 망라하고 글이면 충분했다. ‘잘 쓴 글’이 아니라 ‘쓴 글’이 중요했다. 나는 그런 글을 써 왔다. 책방에는 글이다클럽이라는 프로그램의이 있다. 글이다 클럽은 정해진 시간내에 어떻게든 완성된 글 쓰기를 목표로 한다. 전문가를 초빙해 글쓰기 강좌를 열거나 글 쓰는 팁을 공유하진 않는다. 참가자들은 내가 담고 있는 그릇을 빠르게 파악하고, 오손도손 알아서 잘한다. 나는 그런 분위기에 강하다. 지금 여기 모인 12명의 사람과 나는 아마 이런 싸움을 할 것이다. 밀고 당기기. 분위기가 팽팽하다. 나는 글쓰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아주 쉬운 일이다. 쓰려고 하니까 써지더라. 이렇게 해서 책까지 낸 사람이다라며 들고 있는 책을 보여줬다. 안 믿어 줄 것 같아서였다. 나는 아직 사람들이 무섭다. 하지만 곧 괜찮아질 것이다. 여기는 지구불시착이기 때문이다. 하루 12시간 이상 머무는 곳. 나의 홈그라운드! 나는 더 뻔뻔해져야만 한다. 내가 뻔뻔할 때 사람들이 웃는다. 사람들이 웃으면 나도 웃는다.
지구불시착에는 위대한 법칙이 하나 있다. 에라모르겠다의 법칙이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법칙이기도 하면서 부끄러움을 용기로 바꾸는 법칙이다. 미완성을 완성으로 치닫게 하고 지배하던 불안한 마음이 안도감이 되는 힘이 에라모르겠다의 법칙에 존재한다. 그 힘을 믿는다. 오늘 그 힘이 나에게 기적이 될 것이다. 기적이 되었으면 좋겠다. 나는 아직 사람들의 눈치를 본다.
사람들은 글을 쓰기 시작한다. 몇몇은 노트북에, 또 몇몇은 공책에 쓴다. 나는 글 쓰는 사람들의 모습을 좋아한다. 글줄이 나아가지 않더라도 글 쓰는 사람을 동경해 왔다. 잘 쓴 사람의 글을 읽을 때 그랬다. 최근에는 이슬아 작가의 글을 읽으며 부러움과 동경을 느꼈다. 글을 잘 쓰고 싶다. 하지만 동시에 글 쓰는 모습에 만족하기도 한다. 그것이 바로 글 간지이다. 글 쓰는 사람에게는 분위기가 있다. 분위기는 글을 나아가게 한다. 작가는 스스로 분위기를 만들고 분위기는 작가의 글에 풍미를 더한다. 따라서 나의 글쓰기는 분위기로 시작하고 에라모르겠다로 마무리 된다. <분위기와 에라모르겠다> 게임으로 표현하면 에이스 원 페어와 다르지 않다. 승률이 높아지는 게임이다. 누군가는 먼 곳을 응시하는 선택을 한다. 천장과 조명 사이의 어딘가에서 해답을 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또 누구는 제법 긴 글을 썼고, 그 옆 사람은 중간까지 써 내려간 문장을 통째로 날려버리고 다시 쓰고 있다. 아직 두꺼운 외투를 벗지 않은 사람도 있다. 금방이라도 가방을 들고 일어날 것만 같다. 어딘가 불편하다는 증거일 수도 있다.
오늘부터 기온이 급락한다는 뉴스를 들은 아내는 두꺼운 점퍼를 꺼내 입으라고 했다. 저녁엔 꽤 쌀쌀할 거라 말했다. 창밖에 바람이 거세다.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지고 굴러다닌다. 내 당도 함께 떨어져 굴러다닌다. 음악이 필요한 시간이다.
유튜브 창을 열고 글쓰기 좋은 음악을 검색하면 다양한 리스트가 나온다. 의자를 끌어당기고 향이 좋은 핸드크림을 바르는 것과 글쓰기 좋은 음악을 듣는 것은 글을 쓰기에 이유 있는 비법이 될 수도 있다. 무라카미 하루끼는 좋은 루틴이 좋은 글을 쓰게 한다고 했다. 소설가 김훈은 연필을 준비한다. 어느 시인은 글쓰기를 위해 책방 지구불시착에 온다.
멜로디가 나오자 마주 앉은 분의 얼굴이 밝아졌다. 말로 하지 않았지만, 숨통이 트인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다행이었다.
허공을 주시하던 분은 글을 써본 적이 많지 않아 걱정이었는데 그냥 편하게 마음먹고 쓰려고 하니 어떻게든 써지더라고 말씀하시며 문을 나섰다. 밖이 보고 싶다고 입구에 앉으신 분은 여기까지 온 것 자체가 또 하나의 기적일 거라며 말씀하셨다. 두꺼운 외투를 입고 있던 분은 아무 말씀도 없이 들어 온 길로 나가셨다. 횡설수설했던 나의 이야기를 가장 잘 들어주신 분은 얼마 전 책방을 방문하셔서 내 책을 구입하셨다고 하시고 책방의 다른 프로그램도 관심 있다고 말씀해주셨다.
사람들이 모두 사라지고 책방 조명의 3분에 1만 남겨뒀다. 최근 가장 좋아하는 새싹 보리차를 준비했다. 컴퓨터 앞에서 오늘 쓴 원고를 고쳐 쓰며 문득 아주 갑자기 오래전 애니메이션 사랑의 학교 주재가가 생각나 흥얼거렸다.
“오늘은 이라고 쓰고서 나는 잠깐 생각한다. 어떤 하루였나 하고 점수를 주게 되면 몇 점일까?”
by 김택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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