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택돌
아내는 음식에 관해서라면 완벽을 지향한다. 우선 음식에 있어서는 시간과 재료를 아끼지 않는다. 이른 새벽부터 김밥 도시락을 준비한다. 김밥 재료는 항상 준비되있다. 오이, 고봉, 참치, 새우, 명란젓, 멸치를 주재료로 하고 계란, 당근, 시금치, 소세지는 부재료로 이들의 합을 고려해 매일 다른 김밥이 만들어진다. 아내의 김밥은 지인들에게도 정평이 나있는데 어떤 이는 김밥연구가 아니냐는 말도 했다. 아이들 간식에도 치밀한 계획을 세운다. 요거트를 위해 반나절 오븐 앞에 서 있을 때도 있다. 우리 가족의 삼계탕에는 뼈가 없는데 뼈를 골라내어 아이들이 먹기에 불편이 없기 위해서이다. 아직 매운 걸 못 먹는 딸아이의 입맛과 한식을 좋아하는 성장기 아들의 입맛, 빵과 토스트를 좋아하는 나의 입까지 고려해 음식을 하다보니 아내는 하루를 거의 주방 앞에서 보내고 있다.
3년 전인가 아내가 매실주를 담궜다. 그 때나 지금이나 나는 여러 가지 음식에 관심이 없고, 특히 주류와 식물계에 조예가 빈약했기에 청록색의 동글동글한 것이 매실이겠거니, 매실을 용기에 넣고 소주를 붓기만 하면 술이 되겠거니 정도의 추측만 하다가 까맣게 잊었다. 그 사이 그 많은 매실주 용기가 어디에 어떻게 보관되고 있었는지조차 관심이 없었다. 아내가 갑자기 매실주 이야기를 꺼낸 건 손흥민이 epl 득점왕이 된 다음 날 아침이었다. 내 머릿속은 온통 손흥민의 23번째 원더골의 환희에 머물러 있는 반면, 아내는 축구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 그날 아침의 관심사는 우리에게 너무 달랐다.
“혹시 수잔, 순심, 서희 술 좋아해?” “술? 수잔은 마시는 걸로 알고 있는데 순심은 마시면 죽을 것 같고, 서희는 운전하고 다녀 술 먹을 시간이 있는지 모르겠네. 왜?” “매실주가 너무 맛있어서 술 좋아하면 좀 줄까 해서. 물어봐봐.” “알았어.”
유튜브 손흥민 득점왕 영상을 돌려보며 건성으로 대답했지만, 아내가 만든 음식을 누군가에게 전할 때는 그 맛에 진가는 일천이백퍼센트를 넘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내가 음식 이야기를 할 때 내가 축구를 본다는 건 목숨을 건 행동이나 다름없다. 나는 위험을 직감하고 유튜브의 창을 닫는다.
수잔과 순심, 서희는 나와 그림을 그리며 친해진 초식성 친구들이다. 내 주변은 예전부터 초식계 친구들이 많았고, 아내도 그런 친구들에 대해 호의적이었다. 결과적으로 매실주는 수잔에게만 돌아갔다. 수잔은 매실주가 너무 맛있다며 매일 매일 매실주 마실 수 있어 좋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메시지 그대로 아내에게 전했더니 아내 역시 기분이 좋았는지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하라고 했다.
“그게 그렇게 맛있어?” “당연하지 마셔볼래?” “좀 줘보던가” 했더니 아내는 말끝에 묻어있는 무성의한 뉘앙스에 빈정이 상하면서도 먹어보라며 소주잔 보다 약간 작은 종기에 담아 내준다. 혀를 날름 내어 종지에 찍어봤더니 그것만으로도 진하기가 상상을 넘었다. 안면 근육은 오작동 수준으로 오만가지 인상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본 11살 꼬마 아이와 아내는 배를 잡고 웃는다. 아내는 제법 술을 멋지게 마실 줄 알고, 나는 술맛을 알지 못 한다. 아내와 아이들에게 나의 음주력은 종종 조롱거리가 되기도 하는데 사실 그 정도로 약하기보단 술에 약한 연기를 했을 때 유독 가정이 화목으로 단단해지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아내는 매실주를 잔에 따르며 술맛도 모르는 사람에게 주긴 아깝다고 한다. 사실은 아들이 대학에 들어가면 아들과의 첫 독대를 위해 매실주를 만들어 개시하려고 했던 거라며 비밀도 털어놓고 매실주도 털어 마셨다. 나는 술맛을 몰라 취할 일이 없지만, 가끔 아내의 그런 터프한 모습에 취하기도 한다.
by 김택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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