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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불시착 김택수 Aug 29. 2023

대범한 상상


그림은 어떤가요? 마음이 편안해지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는데 쉽지 않습니다. 어제 비가 많이 왔어요. 요즘은 비가 오면 불안해지곤 합니다. 책방에 비가 새서 책이 많이 상한 게 이유입니다. 저는 원래 비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작은 비를 보면 한숨 쉬어갈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어서 좋고, 큰 비를 만나면 분주해지는 사람들의 걸음이나, 펑하고 켜지는 우산 소리가 이벤트 같아서 좋았습니다. 그런데 이 번 장마는 평화와 거리가 있게 느껴집니다. 

최근에는 편안한 마음을 위해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그런 시간에서 꽤 효과를 보고 있습니다. 당신은 글 쓰기를 좋아하나요?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나요? 저에게 물으신다면, 요즘은 글쓰기라고 대답할 것 같아요. 당신은 어때요? 


마포 서강도서관에서 대범한 상상을 주제로 3회 차 강연의뢰를 받았습니다. 대상은 중학생 아이들이라고 합니다. 오늘은 첫째 날이고 글쓰기를 수업할 예정입니다. 집에서 마포까지 거리는 1시간 정도 예상했는데 조금 일찍 도착했습니다. 카페에 들어가 커피를 주문했습니다. 차를 마시고 싶었지만 커피만 있고 차는 없었습니다.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면서 차를 마시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요즘 차가 좋습니다. 따뜻한 차를 마시면 어른이 된 기분이 들어요. 차는 시간을 차분하게 만들어서 차인가 봅니다. 차가 없다니, 차분한 시간을 방해받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기분이 별로였습니다. 사실은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닙니다. 문제라면 차가 없고 커피가 있는 정도인데 커피도 나쁘지 않습니다. 이 정도로 사소한 걱정이 전부인 오늘이라면 극복도 시간문제입니다. 당신에게 행복이 뭘까요? 묻고 싶어지는 아침입니다. 다행히도 이 카페에는 마음에 드는 음악이 흐르고 있습니다. 블르하츠의 린다린다가 반복재생되고 있습니다. 한때 즐겨 듣던 노래입니다. 


저에게는 한 가지 숨기고 있는 비밀이 있습니다. 지금 당신에게 말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10년 만에 듣는 린다린다 때문이라고 해도 괜찮겠습니다. 비밀은 어떤 걱정이라도 잠시 분리시킬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겁니다. 사람들에게는 끝도 없이 고민이 생겨납니다. 그 고민을 어디에다 두고 살까요? 저는 그 고민이 모여 창고처럼 쓰이는 장소를 알고 있습니다. 바로 그림자였습니다. 고민을 먹고사는 그림자를 풀어놓으면, 아 그것은 그림자가 몸에서 약간 떼어 놓으면 가능합니다. 저는 그림자를 분리하는 방법을 알고 있어요. 그것은 아주 간단합니다. 눈을 감고 마음속으로 풀어져하고 말하면 몸과 그림자의 페어링이 해제됩니다. 아직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페어링 분리가 다른 사람에게도 효과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그림자가 분리되면 더 이상 고민이 생기지 않습니다. 커피를 마시는 동안에는 고민을 하지 않기 위해 페어링을 해제합니다. 그러면 생각이 가벼워집니다. 현재 시간은 9시를 조금 넘은 시간인데 카페는 적당히 사람들이 있습니다. 


"요즘 좋아하는 아이돌 있어?" 옆자리의 대화를 듣고 나도 생각해 보았지만 요즘 아이돌은 도통 떠오르는 얼굴이 없습니다. 세대차이를 느끼 게 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다른 생각을 해보기로 합니다. 앗 실수였습니다. 그림자가 슬며시 다가와서 발끝에 도킹을 시도합니다. 재빠르게 눈을 감고 페어링 해제를 명령합니다. 위험했습니다. 연필과 노트를 꺼내어 동그라미를 그려봅니다. 아주 천천히. 동그라미를 그리는 일은 차를 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마음이 비워지고 그림자가 멀어집니다. 커피잔을 하나 더 그리고 그 아래 이렇게 썼습니다. 좋은 것만 생각해 볼까요? 이제 편안한 마음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림자는 질투하는 모양으로 다리를 꼬고 있습니다. 남은 커피를 마시고 노트와 연필을 챙기고 카페를 나서려다가 그만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심술 많은 그림자가 발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이 글은 서강도서관에서 "대범한 상상"이란 프로그램 중 어린이들과 함께 여러 가지 미션을 클리어하며 쓴 글입니다.


by 택수

instagram @illruwa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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