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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불시착 김택수 Mar 02. 2024

주머니 속의 장르 21

지구불시착 드립력


책방을 옮기고 음료에 대한 다양한 잔소리를 들었다. 음료가 필요하다는, 음료는 하지 말라는, 한다면 주류를 겸하라, 커피와 차만 있으면 된다, 커피는 캡슐로 하라, 모카 포트가 좋다, 드립이 쉬울 거다, 커피를 팔지 말고 기부금 형식으로 하자, 책을 사는 사람에게 무료로 제공하자…… 등 너무나 많은 의견을 들었다. 하지만 나는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나의 계획은 대부분 이미지다. 예를 들면 이런 상상을 한다. '적당한 때가 되면 누군가는 테이블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글을 쓰겠지?' 이것이 지구불시착에서는 미래이며 아주 구체적인 계획인 것이다.

결국 드립커피로 결정됐다. 수연과 창필이 구수하당에서 사용하던 최소한의 장비를 준비해 줬다. 원두의 양과 커피 필터를 접어서 드립퍼에 올리는 방법, 린씽과 저울의 사용법을 알려줬다. 법랑 주전자로 물을 내리는 방법은 최초 50g을 내리고, 30초를 세고, 또 200g을 내리고, 또 20초를 세고, 마지막으로 320g이 될 때까지 내리면 된다고 했다. 그것은 양말을 신는 것처럼 간단한 일이었다. 심지어 멋진 일을 하는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원두를 내리는 내 모습은 군살이 하나도 없고, 아이리쉬 헌팅캡에 헐렁한 셔츠만 입어도 느낌있는 마스터. 그것은 가게 분위기를 통째로 바꿀 수도 있다. 원한다면 언제든 도쿄 카페 모드로 변신이 가능한 세계였다. 

원두를 주문했다. 입이 까다로운 창필에게서 오랑오랑의 조르바를 추천받았다. 원두가 도착하고 본격적 카페 놀이가 시작됐다. 택배 상자를 열고 브랜드의 아이덴티티를 설명하는 엽서가 나왔다. 필요 없는 문장이라 무시하기로 했다. 설명서에는 제법 상세하게 원두에 관한 설명부터 물의 적당 온도와 추출 방법, 원두의 양이 표기되어 있었다. 창필이 이야기한 대로였다. 너무나 간단히 간지의 영역에 진입할 수 있었다. 여기까진 그랬다.


이제 커피가 준비 됐음을 알리고 사람들에게 시식을 권했다. 먼저 한 달 전까지 함께 했던 공동체 선생님들에게 맛을 보일 생각이었다. 사실은 맛보다 멋있어 보일 생각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계획은 그랬다. 나는 원두를 보이기 이전부터,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커피를 내리겠다고 선언하자마자 촌천살인의 잔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손은 씻었나?부터 주전자를 쥐는 방법, 린씽을 하는 물의 양과 커피 필터에 물이 닿으면 안됀다, 원을 그려라, 커피를 흔들지 마라, 커피의 양이 많다, 컵이 차다 등 맛보다 잔소리의 영역에서 넉다운이 되고 말았다. 이상하게, 정말로 이상하게 내가 커피를 내리면 모두가 한 마디씩 거든다. 도무지 집중할 수가 없다. 


도쿄고 뭐고, 원두가 뭐고, 마시는 취향도 제각각인데 커피를 내리는 방법도 다 다르다. 그것을 어떻게 나에게 기대하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사람들은 나에게 아무런 기대를 안 하는 것일 수도 있다. 내가 무엇을 하든 잔소리하는 재미로 오시는 것이다. 틀림없이 그쪽이 한결같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래서라도 좋다면 얼마든 들어줄 수도 있다. 드립 커피 4천 원은 잔소리 폭격 포함가격이다. 그것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지구불시착 드립의 맛이다. 쾌감마저 느껴지는 맛이랄까. 



by 김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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