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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불시착 김택수 Jan 25. 2019

임시불시착

강민선

임시불시착

망원역에서 6호선을 타고 태릉입구역으로 가는 길이다. 한 싱어송라이터의 여행 에세이를 읽으며 앉아서 가고 있다. 얼마 전 그녀가 내레이터로 등장하는 여행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일본 시골 마을을 찾아다니는 프로그램이었는데 이미 일본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일본말도 능숙했다. 언제 저렇게 다녔을까. 일본어 공부는 언제 저렇게 했을까. 그녀는 이미 세 권의 여행 에세이를 쓴 적이 있다고 했고 그중 두 권을 바로 구입했다. 책 안에 내가 궁금했던 것들이 다 있었다. 이십 대 시절 일본으로 유학을 다녀온 적이 있었고 그 후로도 종종 짐을 싸서 한 달 씩 장기 여행을 떠난 대부분의 이유는, 마음이 힘들어서였다. 

나는 저렇게 훌쩍 떠날 용기도 없는 건가. 아니면 아직은 저토록 힘들진 않다는 뜻? 혼자 그런 생각을 했다. 

내가 사람을 만나는 걸 꺼려하는 이유는, 사람 앞에서 내가 너무 노력하기 때문이다. 조심하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하게 될까 봐. 조심은 잠깐이지만 후회는 영원하니까. 이런 생각을 하면 사람을 만나는 일이 정말 쉽지가 않다. 특히 낯선 사람. 낯선 장소. 

집에선 무슨 말을 해도, 어떤 모습을 보여도 자연스럽고 심지어 재밌고 즐거운 사람인데 왜 밖에만 나가면 그렇게 변하는 걸까. 언제부터 그렇게 된 걸까. 

혹시 이게 도서관을 그만두게 된 이유와도 관련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요즘 나는 밖에 나가야만 할 때, 누군가 낯선 사람을 만나야만 할 때, 몇 번이나 심호흡을 한다. 속으로는 이렇게 말한다. 애쓰지 말자. 편안하게 하자. 상대방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를 먼저 걱정하지 말자.  

태릉입구는 대학시절 늘 걸었던 곳이다. 역에서 대학교까지 가려면 15분은 다시 걸어야했지만 붐비는 스쿨버스가 힘들어서 그냥 걸었다. 

월곡, 상월곡, 돌곶이... 익숙한 이름이었다. 6호선 정거장을 순서대로 외울 수 있었는데. 4년을 다녔고 하루에 두 번씩 지나왔으니. 태릉입구와 가까이 올 때마다 점점 들뜨는 기분이었다. 특별한 지역, 특별한 장소에 가는 기분. 그땐 특별한 곳이라고 생각하지도 못했는데. 

석계, 태릉입구... 내렸다.

(애쓰지 말자. 편안하게 하자.) 

7번 출구에서 직진 200미터. 바로 보였다.

(상대방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를 먼저 걱정하지 말자.) 

익숙한 서점이 아닌 곳은 대부분 택배로 보냈다. 익숙한 서점은 가까워서 자주 들를 수 있는 곳이었으니 결국 집에서 조금이라도 먼 거리는 택배를 택했다. 시간을 아끼는 것 반, 사람을 대하는 마음을 아끼는 것 반. 나는 한 번에 여러 사람에게 마음을 쏟지 못한다. 금세 소진한다. 이런 걸 마음이라고 가지고 다니나 싶을 정도로 참 작다.  

지구불시착은 전철로 한 시간 거리였다. 

요즘 핸드폰을 묵음으로 해두었더니 연락을 제때 확인하지 못한다. 그러려고 묵음으로 해두었다. 

어제 사장님으로부터 재입고 문의를 하는 연락이 와 있었다. 확인한 시각으로부터 네 시간 전이었다. 이미 밤 열두 시가 다 되었기에 사장님께 내일 택배로 보내겠다고 답하자 내일 저녁까지 필요한데 방법이 없는지를 다시 물었다. 내가 들고 가겠다고 했다. 그 방법밖에 없었다. 

심호흡. 

지구불시착에 도착. 

안녕하세요? 입고하러 왔어요. 

컴퓨터로 작업을 하고 계시던 사장님이 고개를 내밀더니 반짝 하고 웃으셨다. 처음 뵙지만 처음 뵙는 것 같지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그런 사람이 있다. 사실 대부분의 동네 책방 주인이 그런 것 같다. 그러니 괜히 마음을 쏟는다느니, 마음이 작다느니, 이런 생각 안 해도 될 텐데. 






사장님이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만들어주셨다.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책방 사장님이 만들어주시는 커피는 다 맛있다. 며칠 굶고 온 사람처럼 맛있게 마셨다. 

사장님은 어제 남양주에서 사서 100명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고 오셨다고 했다. 거기서 <아무도 알려주지 않은 도서관 사서 실무> 이야기를 하셨고 책이 다 팔려서 급하게 재주문을 하셨다고. 오늘도 책을 사가겠다는 분이 있어서 할 수 없이 연락했다고 하셨다. (그 분은 잠시 뒤에 무려 아홉 권이나 한 번에 사가셨다. 한 권 남았네.) 책을 만들고 파는 일을 업으로 하고 있으면서 이런 소식은 여전히 기적 같은 이야기다. 그래서 좋다.   

테이블에 마주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뭐랄까, 사장님은... 염색을 하지 않아 흰 머리가 듬성듬성 자라 있는 내 머리카락이 전혀 부끄럽지 않게 느껴지는 분이었다. 다정다감이 온몸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분 같았고, 그렇다고 섣불리 예상해선 안 될 것 같은 섬세함도 있었다. (이렇게 사람을 관찰해서 기록하는 건 좋은 습관일까 아닐까 조심스러워하며 이 글을 쓰고 있다.)

어제 강의에서 사장님은 당신이 만들고 싶은 도서관에 대해 이야기했다고 한다. 

일단 그 도서관은 십진분류법을 적용하지 않습니다. 십진분류법 너무 촌스럽지 않아요?

책에 라벨을 붙이지 않아도 됩니다. 라벨 그거 지저분하지 않나요?

도서관 사서들은 책을 정리하지 않아도 됩니다. 책은 이용자가 알아서 정리하고 찾아봅니다. 

사서들은 도서관에서 책을 읽습니다. (가장 혁신적인 부분이라고 생각되어 박수를 치고 말았다.)

비싼 서가나 책상 대신 사서들이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이 가장 훌륭한 인테리어 아닐까요?

사장님 말씀에 반성이 되기도 했다. 도서관에서 사서들은 언제나 바빴고, 도서관을 찾은 이용자와 인사 한 마디 나눌 시간조차 없었다. 

도서관 안에 지류와 문구류가 함께 있어서 책을 직접 만들 수도 있습니다. 

사장님은 이때 망가진 다른 책등에 붓으로 풀칠을 하고 있었다. 

사장님은 꼭 그런 도서관을 만들고 싶다고 하셨다. 

꼭 그랬으면 좋겠다고 말을 하기도, 안 하기도 뭐한 상황.

우울할 땐 푸딩클럽이라는 걸 만들었어요. 가입비(오천 원)가 있고 이천 명 모집이 목표라고 했다. 그럼 이십조... 지금 스무 명 모집했어요. 한 달에 글 한 편씩 써서 메일로 보내주시면 브런치에 올리는데 혹시...  

그럼 제게 적어도 이천 명의 고정 독자가 생기는 거네요? 라고 아주 실리적인 이유를 대면서 가입했다. 

사장님은 ‘임시제본소’라는 이름이 좋다고 하셨다. 

‘지구불시착’이라는 이름도 좋아요. 

제가 아직 정착을 못해서... 

저도 ‘임시’잖아요. 

사장님은 하루에 두 권 팔리면 성공한 거라고 했다. 제가 오늘 성공시켜드릴게요, 하면서 책을 골랐다. 

사장님이 직접 쓰고 만든 책을 샀다. 손으로 만든 책이었다. 재단 면을 고르게 수정하려고 하셔서 괜찮다고 했다. 만든 책만 가지는 불규칙성이 더 마음에 드니까. 

지구불시착에 모인 사람들끼리 서로에 대한 글을 써서 만든 소설 시리즈는 접는 책이었다. 하나하나 붙이고 접어서 만든 아코디언 같고 병풍 같은 책.    

해가 들어오는 좋은 자리에 앉아 이글을 쓰고 있다. 이랑의 노래가 들린다. 교토 세이코샤 서점에서 사온 <신의 놀이> 앨범이다. 거기에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미워하기 시작했다>라는 노래를 들으면서 으아, 이런 감정은 나만 가지는 게 아니었구나 생각했다. 







지금껏 일본에 두 차례 갔는데 그때마다 행선지는 교토였다. 도착하는 순간 여긴 앞으로 자주 오겠다 싶었다. 교토 여행에서 본 일본 책들이 하도 예뻐서 나도 세로쓰기로 만든 책이 있다. <시간의 주름> 아시는 분...? 아무튼 그 책은 지금 나한테 없다. 200권 만들었는데 다 나갔다. 어딘가에 잘 있겠지.   

사장님이 만든 책 ‘불시착’을 읽으며 사장님이 주신 새우깡을 또 열심히 먹고 있다. 진짜 이렇게 맛있는 새우깡은 처음이야, 이러면서. (새우깡 매운맛이었다.) 집에 가는 길에 한 봉지 사가야겠다고도 생각했다. (매운맛으로) 사장님은 그걸 커다란 김치 통 같은 곳에 잔뜩 담아 놓고 드시고 계셨다. 와, 나도 저렇게 먹어야지. 


<끝>   


강민선


instagram  @kangming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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