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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불시착 김택수 Mar 07. 2019

나의 칠백이

by 감성옥장판

나의 칠백이.


2008년 어느 날, 갑자기 나는 카메라를 한 대 샀다.


인증샷 말고는 사진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던 내가,

어릴 때부터 사진 찍히기를 끔찍이도 싫어하던 내가.


혼자 책을 사고 읽고,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고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하던 것에 싫증을 느껴가고 있던 때였는데

어릴 적 아빠가 찍어주던 카메라가 생각났고 뭐에 홀린 것처럼 연식이 있는 수동 필름카메라를 덜컥 사버렸다.


디지털카메라 하는 게 슬슬 일반인들에게도 퍼지고 있던 때에 필카라니.. 게다가 자동도 아니고 수동이라니...

주위에선 다들 날 희한하다 말했고 사진의 ㅅ 도 모르는 나 스스로도 희한하다 느꼈지만 원하던 카메라를 손에 넣었따.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내가 카메라를 구입하러 갔던 날이.

인터넷으로 공부를 한 뒤에 충무로,남대문을 싹 훑어가며 하나하나 직접 만져보고 얘기듣고 좋은 상태의 중고를 구입하게 되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였지만 중고거래전에 확인해야할 것들을 미리 알아두고 갔던지라 온갖 아는척은 다하면서 그렇게 "칠백이" 라는 애칭까지 지어준 생애 첫 카메라를 품에 안았다. :)


사진 찍히는 걸 싫어했던 나였지만 아빠가 자동카메라로 찰칵찰칵 찍어주던 그 소리는, 그 순간은 좋아했었나 보다.

그리고

그 필름을 동네 작은 사진관에 맡겨두고 찾으러 가기 전까지 며칠 동안 내심 기대하고 궁금해하고 설레었단 그 순간들이 좋았나 보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필름 카메라는 참 비싼 존재였다.

필름 가격도, 현상 가격도, 스캔에 인화에......

그래도 처음 장난감을 가진 아이처럼 너무 설레고 신나서 열심히도 찍었더랬다.

찍을 줄도 모르고 조작법도 인터넷으로 보고 겨우 아는 주제에 욕심은 많고 호기심은 많아서 흑백 필름도 써보고 영화용 필름도 써보고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하고...


필름 아까운 줄도 모르고 .. 찰나의 순간이 아까운 줄도 모르고  '이것도 나중엔 추억이야' 하면서 평소 인증샷 찍듯이 셔터를 마구 눌러댔다.

백통 가까운 필름을 쓰고 나서야 필름 한 컷이, 한 순간의 그 찰나가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답고 아까운 것인지를 깨달았다.


난 디지털은 안 쓸거야! 단언 했지만 사진을 찍다보니 그리고 세상의 변화에 자연스럽게 디지털로 넘어오게 됐고 그렇게 디카에 필카에,, 카메라를 두세 대씩 들고 다니다가 무겁기도 하고 유지가 힘들다는 이유로 한동안 나의 칠백이는 집에서 잠만 자고 전시용으로만 있었다.

그러다가 2년 정도 후인 2017년 제주를 다니기 시작하면서 다시 칠백이를 꺼내들었고 지금도 어디든 함께 하고 있다. 

세상이 좋아져서 내가 찍은 필름을 파일로 받아 컴퓨터로도 볼 수 있고 저장도 가능해져서 언제 어디서든지 꺼내볼 수 있지만

여전히 나는 인화를 한다. 제일 맘에 드는 사진들로.

어릴 때 설레었던 그만큼은 아니더라도 여전히 현상을 맡기고 스캔 파일을 확인하고 또 인화를 해서 어떻게 나올까 궁금해하며 내 손에 받아보는 게 사진이라고 생각해서.

그리고 여전히 그 시간들이 설레고 흥분되는 까닭에. 

이제 봄이다. 봄이 왔다.

미세먼지가 극에 달하지만,,, 지금까지처럼 또다시 칠백이를 들고서 올해의 찰나의 순간을 기록하고 느끼러 나가봐야 할 때가 와서 행복하다!






by 감성옥장판

instagram @p.s.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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