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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불시착 김택수 Mar 21. 2019

석촌호수의 피아노바

by 수연



‘제일’이라는 건 없을지도 모른다. 상황에 따라, 경험에 따라서 변할테니까. 어릴 때 제일 부러워하던 나이가 18살이었는데, 그렇게 맞았던 18살이 너무 하찮고 별 일 없이 지나간 것처럼.


그럼에도 자주 ‘제일’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생각하는 것에 집착하곤 한다. ‘제일’을 정해놓으면 말수가 적은 내가 눈을 반짝이며 한참을 이야기할 거리가 생긴다. 또 기분에 따라 ‘제일’을 따르거나 피하면 평온에 이를 수 있다. 그리고 나를 소개할 말이 생기고, 가깝고 싶은 상대에게 물을 말도 생긴다.


“나는 두부를 제일 좋아하는데, 너는 무슨 음식을 제일 좋아해?” 처럼.  






나는 오늘 제일 좋아하는 장소에서 제일 좋아하는 노래를 들었다. 기분은 지금 편안함을 넘어 최고로 충만하다. 제일 좋아하는 석촌호수까지 오기 위해, 집에서 기어다니던 몸을 일으켜 목욕을 하고, 예의를 차려 조금의 치장을 하고 나와 50분정도 버스를 탔다. 도착하고는 깜깜해지기 직전까지 기다리다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를 틀었다. Billy Joel의 Piano Man이 흐르는 남색의 석촌호수는 가장 예뻤다.




석촌호수는 친구랑도, 가족이랑도, 남자친구랑도 왔다. 좋은 사람과 함께하는 이 곳도 멋지지만, 혼자 있을때는 그보다 조금 더 멋지다. 2년 전부터 이 곳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장소가 되었다. 적당히 가까워 언제든 찾을 수 있고, 고요하고 익숙해서 편안해지는 곳. 생각이 너무 많거나 너무 없을 때 혼자 산책을 했다. 따듯한 날 아침에는 책을 읽기도 했고, 추운 날 밤에는 음악을 들었다. 찬 바람속에 한참 앉아있어도 감기에 걸리지 않았다. 여기서 혼자 듣는 음악들은 어느때보다 완벽하게 들렸다. 마음 속 화가 죽고, 굳은 표정이 풀어지고, 답답한 속이 뚫렸다.





Piano Man은, 고등학생 때 처음 듣고 제일 좋아하는 노래로 정하기로 했다. 이 노래를 들으면 모든 근심이 무심하게 느껴지고, 사람들이 귀여운 미니미처럼 보이며 내가 있는 곳만이 더욱 크고 예쁘게 보인다. 오늘 호수에 앉아서 오랜만에 뮤직비디오도 보았다. 피아노맨은 추억을 연주해달라고 부탁하는 노인, 영화배우가 되고싶은 바텐더, 일이 바빠 아내를 보지 못하는 부동산업자, 부자 사업가를 꼬시려는 웨이트리스 등을 관찰하며 위로의 노래를 부른다. 나는 항상 그 옆에서 능숙하고 태연하게 하모니카를 연주하고 싶었지만, 오늘은 무료함을 견디지 못해 집을 뛰쳐나와 피아노바를 찾은 백수로 등장하게 되었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지만 지금은 충분히 가볍다. 나의 ‘제일’은 계속 변하겠지만 어떤 것으로 갈아타든 그것을 누릴 때의 이 감정은 영원할 수 있지 않을까?  언제 가든 나를 넓게 안아주는 곳은 그대로 있어줬음 좋겠다. 가까운 이들과의 약속 장소를 정할 때 항상 권할 말이 있어 다행이다. “석촌호수에서 보자”고. 더 완벽하도록 어서 내가 석촌호수 피아노바의 여유로운 하모니카맨이 되었으면 좋겠다.





https://youtu.be/xONCQCD3-zU


by 수연

instagram @yoridogjoripu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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