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코로나 때문에 뜸하셨나 봐요
사이버러버 재우 씨가 마른 우산을 들고 벤치에 앉아서, 브레이크 타임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돌아오는 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문을 열어 주니까 지정석이라도 되는 듯 너무나 자연스럽게 다찌 끝자리에 앉습니다. 책을 꺼내는 걸 보니까. 영업이 끝날 때까지 있을 작정인가 봐요. 주문한 하이볼과 함께 오늘은 카레와 밥을 조금 덜어줬어요. 이 정도면 다른 손님들 눈에는 재우 씨가 이 식당의 인테리어 소품처럼 보일 수도 있겠단 생각에 조금 측은한 마음이 들었어요. 그래 마음이 허할 땐 배라도 불러야지.
소나기가 한차례 지나갑니다. 그리고 한 커플이 등장합니다. 빈자리 두 개가 나란히 남아 있는 걸 확인 한 남자는 다행이다~하는 표정으로 휴대폰으로 먼저 찜해둬요. 키오스크 앞에서 남자는 꽤 익숙한 티를 내며 꼼꼼한 설명으로 여자의 선택을 도와줍니다. 아마도 아는 단골 식당이 있다며 새 여자 친구를 데리고 온 모양이에요. 식당을 하다 보면 단골에게서 종종 보게 되는 장면이에요. 그땐 저도 더욱 반갑게 맞이하며 간단한 서비스로 소개해 주신 분의 체면도 챙기고요. 그런데 저는 이 남자 손님이 도무지 기억나지 않습니다. 작은 단서라도 발견하려고 애쓰지만 가물가물
한 번도 연애를 제대로 해본 적이 없는 제 친구 중 한 녀석은 술은 한 잔도 못 마시지만, 오로지 소개팅 때 뽐내기 위한 목적으로 와인을 공부합니다. 어쩌다 애프터의 기회라도 생기면 정작 자신은 운전을 못하는데도 에버랜드 데이트를 잡아서, 끝내 운전대를 여자가 맡게 만들어요. 너무 유행에 민감하고, 책으로 연애를 배우면 가끔 이런 오류에 빠지게 되는 겁니다. 어딘가 어리숙하고 텁텁해 보이는 이 남자가 왠지 그 녀석과 저기 앉아 있는 사이버러버 재우 씨와 자꾸만 겹쳐 보여요. SNS를 통해 데이트 코스의 정보를 미리 숙지하고 온 게 아닌가 의심이 됩니다.
오늘부터 테이블 세팅에 변화를 줬습니다. 끝날 기색이 없는 긴 장마로 실내 공기가 습해져 물컵의 성에가 자꾸만 식탁에 물얼룩을 남겨요. 그래서 테이블 매트의 양쪽을 가운데로 접고, 그 위에 컵받침을 뒀습니다. 여자가 쨍한 바탕색에 레이스 문양의 컵받침을 마음에 들어 합니다. 저는 흐뭇하고요. 그런데 아까부터 남자가 조금 당황해하는 눈치예요. 매트를 펼칠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컵받침을 들었다 놨다. 이건 어디다 쓰는 물건이지~ 하는 표정. 당연히 오늘부터 바뀐 테이블 세팅의 사전 정보는 어디서도 얻지 못했을 겁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처음 왔다!' 단골이라면 무심히 넘어가거나 물어볼 수도 있는 일인데, 새로운 정보 값의 입력으로 남자는 혼란스러워합니다. 여자는 어떤 의심도 없어요. 갑자기 밖에서는 비가 다시 쏟아집니다.
“사장님 오랜만에 왔네요”
남자가 돌발적인 멘트를 던져요. 저는 당황합니다. 제가 어떻게 대답할지 알고 남자가 무리수를 두는 걸까요? 준비한 대사라 그냥 충동적으로 내뱉은 것 같아요. 그의 시나리오에는 제가 어떻게 대답하게 쓰여 있을까요? 여기서 제가 만약 밍밍한 태도를 보이거나 답변을 외면하면 더 큰 오작동이 일어날 것 같은 느낌이에요. 컵받침 하나가 마치 누르면 안 되는 버튼 역할을 한 모양입니다. 남자의 눈빛이 간절합니다. 그리고 초조해하는 게 보여요. 저는 조금 망설이다가…
“네. 코로나 때문에 뜸하셨나 봐요~”
저는 공범이 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더 확실히 여자에게 확신을 주고 싶다는 앞선 생각에 그만 “예전에는 항상 카레만 드셨는데 오늘은 라멘이시네요?” 남자는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고 동공이 다시 흔들려요. 이 남자의 오류 바이러스가 저도 감염시킨 걸까요? 저는 아차! 싶었지만 수습을 못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사이버러버 재우 씨가 이 범행에 자신도 모르게 가담을 합니다. 덤덤하게 “비 오는 날엔 라멘이죠!” 남자는 맞아 맞아, 저는 그치 그치. 남자들의 제 발 저린 호들갑. 그 모습에 여자는 영문도 모른 채 빙그레 웃었습니다. 이렇게 잠깐 위기가 있었지만 우리의 범행은 잘 넘어갔습니다.
남자의 순발력과 연기력이 못 미더운 저는 더 이상의 애드리브 없이 주방 쪽으로 몸을 돌렸어요. 등 뒤에서는 역시 준비한 듯한 남자의 유머가 계속되고 여자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렸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