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인가? 어떤 게 꿈이지?
얼마 전 태풍이 저만 남기고 사람들을 모두 쓸고 갔나 봅니다. 이곳은 손님이 없으면 할 일도 없어, 마치 먼 길 떠나려는 사람처럼 미뤘던 일을 합니다. 작은 선풍기를 꺼내 묵은 먼지를 닦는다거나, 키오스크 금고의 지폐와 동전을 세어본다거나, 정수기 필터를 교체한다거나... 단골손님이 추천해 준 감미로운 재즈를 듣고 있으면 이 지루한 시간이 다시 여유로워져 한 번도 궁금해하지 않던 뉴올리언스에 가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게 하는 여름 저녁. 어둑해져 가는 해물 녘.
붉은 뿔테 선글라스와 붉은 입술. 베이지 톤의 트렌치코트. 비가 와서일까? 파마머리가 조금 풀려 엉클어져 있고, 가려진 눈이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그녀가 늘 오던 가게처럼 빈자리에 앉습니다. 뭔가 시크한… 뭔가 사연이 있을 것 같은… 뭔가 오늘은 마땅히 갈 곳이 없어 보이는… 네! 맞아요. 머리카락이 금발이었다면 딱 ‘중경상림’의 그녀. 오래전부터 기다렸던 그녀를 드디어 오늘 만나게 되네요.
저는 하얀 새 마스크를 꺼내 쓰고, 구레나룻에 몰래 침을 발라 정돈해요. 그리고 아랫배에 힘을 주며 앞치마를 깨끗한 면으로 돌려 맵니다. 괜히 투명한 컵을 조명에 비추어 닦는 시늉을 하고 또 괜히 양파 하나를 도마 위에 올려놓고, 박자감 있는 소리를 내며 칼질을 뽐내봅니다. 이럴 때는 오픈 주방이 참 좋다는 생각을 합니다. 김덕배씨건 까를로스건...
“하이볼 말고 커티삭 미즈와리 부탁해요” 키오스크 사용법 따위는 모르지만, 위스키를 즐길 줄 아는 그녀. 이제부터 여기는 바~입니다. 앞치마를 엣지 있게 골반까지 내립니다. 그러면 어느새 밥텐더에서 바~텐더로 변신 완료. 음악은 ‘테네시 위스키’라는 블루스 전가 기타 소리가 끈적거립니다. 사실 저도 오늘 처음 들어 봅니다. 그녀는 음악에 맞춰 컵 속의 얼음을 돌리더니 담배에 불을 붙입니다. 실내 금연법 따위는 개무시하는 깡. 뭔가 고혹적인… 뭔가 개방적일 것 같은… 뭔가 오늘 만난 남자가 내가 마지막이 될 것 같은…
저는 이미 ‘주문 마감’ 안내문을 내 걸고 이번엔 약속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서둘러 마감 정리를 합니다. 서비스 안주라도 내줄까 했지만 헤퍼 보일까 봐 관뒀어요. 그녀의 술잔은 비워져 가고 담배도 계속 타 들어가고 있습니다. 테네시 어쩌고, 골반까지 내린 앞치마, 반짝이는 컵, 담배연기와 은근히 취기가 오른 그녀. 우린 불과 한 시간 만에 둘만의 시간에 완벽하게 익숙해졌습니다. 저는 준비가 되었어요. 이제 내게 말을 걸어줘. 말을 걸어줘. 주문을 외우는데…
외우는데… 잠결에? 어디선가 몽골 기마병의 말발굽 같은 소리가 들립니다. 설마 까까머리 야구부 소년들이 몰려오는 소리? 꿈인가? 어떤 게 꿈이지? 꺾이지 않는 마음으로 부정해 보려 하는데, 잠에서 덜 깨 어벙벙한 미소를 지은 입가의 침이 무릎 위로 뚝 떨어집니다. 꿈의 마침표를 찍듯. 진짜 꿈이었네요. 나의 중경상림
야구부 녀석들이 밥 위의 오므를 뭉개어 카레랑 죄다 섞어 버립니다. 그렇게 먹는 게 아니라고 몇 번이나 알려줬는데 짜증이 납니다. 단무지와 초생강의 뚜껑을 바꿔서 닫아요. 화가 납니다. 어떤 녀석은 벨트를 풀어헤치며 친구의 그릇을 탐하고, 바꿔 먹고, 또 돌려먹어요. 나의 카레가 겁탈당하는 기분.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한마디 하려는데 운동하는 애들이라 그런지 눈빛이 사납습니다. 눈을 피하는 저는 쓰디쓴 수치심이 느껴집니다.
그렇게 이놈들의 노략질은 계속되고 저는 남한산성에 갇힌 무기력한 인조처럼 주방에서 오도 가도 못하고… 바텐더는 무슨… 초딩한테 졸아버린 그냥 밥집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