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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토루 Oct 03. 2023

환타

아저씨, 1년 더 잘 부탁드립니다


손을 쓰는 일을 하다 보니 데이고, 베이고 오늘은 나가시는 할아버지 문을 잡아 드리다가 그만 문틈에 찍혔습니다. 신기하게도 하♥트 모양의 멍이 들었어요. 남자치곤 손이 작고 곱댔는데 이제야 다쳐가며, 아물어가며 진짜 어른이 되어 되고 있나 봅니다. 장마가 길어져서 인지 대개 손님도 없고 오늘은 더욱 없을 것 같아요. 이럴 땐 꼭 젖은 바지자락으로 찾아오는 단골이 한 분쯤 계세요. 저는 누구인지 모르는 그를 기다립니다.


어른들은 큰 우산 속으로 아이들은 그 옷자락 안으로 파고들어요. 오전에는 미지근한 손님 두 분이 음식도 남기시고. 그게 다예요. 브레이크 타임도 없이 팔을 괴고 졸다가 깨다가 조금 나른한 분위기. 사람들이 사라진 거리에는 배달 오토바이만 게을러진 이 민족에게 식량을 공급하느라 바쁩니다. 온도가 떨어진 티포트가 다시 끓고 둥굴레차는 속절없이 진해지고 있어요.


비가 더 쏟아집니다. 킥보드를 타고 우비까지 챙겨 입은 뉴스보이 율이가 다급하게 가게 앞에 주차하더니, "아저씨 가게 괜찮아요? 비가 너무 와서요!" 율이의 앞머리가 너무 반듯합니다. 아마도 어머니께서 자를 대고 가위로 자르신 것 같아요. 저는 웃음을 꾹 참고는 진지하게 “어! 여긴 괜찮아 마카롱 가게도 가봐!" 녀석은 마치 작전 중인 군인처럼 명령을 수행합니다.


비 오는 어느 여름 저녁


이 정도 비면 나라도 밖에서 외식을 안 하겠다 싶어, 천천히 마감을 하고 있는데 문 앞에 흠뻑 젖은 군인이 서 있습니다. 꾸벅 인사를 하는데 제가 못 알아채자, 모자를 들춰 얼굴을 보여줘요. “어, 환타!” 이곳에서 밥을 먹을 때면 가끔 환타를 함께 시키던 고3 학생이 군인이 되어서 나타난 겁니다. 몇 해전 수능이 끝나고 찾아와서는 "아저씨, 1년 더 잘 부탁드립니다" 라며 씩씩하게 재수를 선언했었는데 그만 입대를 결정했던 모양입니다.


병장이네요. 제법 청년 티가 나서 의젓합니다. 한동안 수없이 들었을 법한 질문은 생략해요. 그즈음에 선택할 수 있는 게 많지 않다는 걸 아니까요. 그리고 어떤 고민과 걱정이 있었을지도 짐작이 되니까요. 설마 이 녀석이 나라 구할 걱정을 했겠습니까. 하지만 나라 지킬 생각은 있었나 봅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찾아오면 맥주 한 잔을 주는 게 이곳의 전통입니다. 술이 금방 사라져요. 그럼 한 잔 더. 찾아줘서 반갑고 고마운 마음을 그렇게 전합니다.


오랜만에 군복을 마주하니 추억에 잠기기도 하고, 요즘 군대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오늘 비가 이렇게 많이 오는데 너를 기다리기 위해 문을 열어 두고 있었다고 너스레를 떨었더니, 내일 복귀라 하마터면 못 보고 갈 뻔했다며 가슴을 쓸어내리는 시늉을 합니다. 넉살이 더 늘었습니다. 이 식당도 스스로 찾아왔으니 어쩌면 한동안 외면하던 것들과도 조우를 했겠지요. 이렇게 익숙한 것들 곁으로 돌아왔으니, 이제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저씨! 제대하고 딱 1년만 아저씨 밥 먹을게요. 잘 부탁드립니다!”

“오라이~ 오늘 환타는 서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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