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져라 헤어져라 오늘 헤어져라
쏴~~ 하고 갑자기 비가 내립니다. 장마니까. 장맛비답게 무섭게 내립니다. 손님들은 갑자기 쏟아지는 비에 모두들 식사를 멈추고 한동안 창밖을 봐요. 다시 한두 분씩 딸그락딸그락. 비가 조금 잦아들었을 때 나가시려는지 평소보다 천천히. 저는 내리는 빗소리와 그릇에 수저가 부딪치며 내는 소리가 듣기 좋아요. 라멘을 먹던 꼬마의 하얀 목덜미에서 땀이 맺히는 게 보입니다. 그래서 저를 향해 있던 선풍기를 돌려서 바람을 보내요. 시원한 바람이 닿자. 아이는 깜짝 놀라서는 수줍은 목소리로 “고맙습니다”
손님들이 요리하는 모습을 훤히 볼 수 있는 오픈 주방은 여름엔 덥고 습한 구조입니다. 특히 육수가 끓고 있는 불 앞의 저는 항상 젖어 있는. 뭐랄까... 정열적인 에스파냐 한 느낌의 섹시남 '까를로스' 이랄까. 비가 언제 그랬냐는 듯 뚝 그치고 식사가 끝난 손님들은 하나 둘 돌아갑니다. 저도 밖으로 나가 봐요. 파라솔들은 일제히 차렷! 어느새 카페 사장님들이 다 접어 놓으셨네요. 잠깐 내린 비가 이 여름의 열기를 식혀서 인지 시원한 바람이 불어요. 길 한편에 서서 허수아비처럼 양팔을 벌리고 고개를 하늘로 쳐들어요. 눈을 감습니다. 그리고 목덜미로, 겨드랑이로, 반바지 사이사이로 개운한 바람이 지나가는 걸 느낍니다. 바람이 물결치는 넓은 들판도, 바다 한가운데 떠있는 유람선의 뱃머리도 아니지만 혼자서 그렇게 영화 속의 주인공이 되어 봅니다. 그 진짜 이유를 알고 보면 부산 달동네 출신의 자영업자 '김덕배'씨의 조금 안쓰러운 모습이지만요.
마을버스가 바람에 건조된 제 앞에 정지합니다. 엄마 품에 안긴 아기가 창밖의 저를 향해 하이~합니다.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나도 하이~ 아이가 잇몸을 드러내고 웃습니다. 그제야 엄마가 창밖을 두리번거리고, 저는 시치미를 뚝. 버스는 다시 출발해요. 습기 때문인지 저의 곱슬 머리카락은 더욱 곱슬거립니다.
가게로 돌아오니, 손님들은 모두 돌아가고 가지런히 포개져 있는 그릇, 쌓아 올린 물컵, 정돈된 의자와 테이블. 저는 기분이 좋아져서는 맥주 한 병을 꺼내 제 자리에 앉아요. 앗! 그런데 아까 아이를 향하게 했던 선풍기를 다시 제가 있던 방향으로 돌려놓으셨네요. 저도 속으로 ‘고맙습니다’ 오늘은 씁쓰레한 맥주가 입속에서 더 감기는 것 같아요.
장마가 시작되었으니 한동안 손님이 뜸할 것 같아요. 그래서 버리려고 했던 청바지는 좀 더 입고, 갖고 싶은 운동화는 다음 달에 사야겠습니다. 오후에는 밥을 조금만 하고, 바닥 청소는 내일로 미뤄도 될 것 같아요. 내일도 비가 올 테니 퇴근할 때 우산 꽂이는 들여놓지 말고, 이웃 가게 그늘막을 넓게 펼쳐 놔야겠어요.
오늘 불쑥 친구가 말도 없이 찾아와서, 술 먹자고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마침 그놈이 최근에 설익은 만남을 가지던 여자와 헤어져서, 속상해서, 혼자 있기 싫어서 날 계속 붙잡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그러니까. 술값은 당연히 그 녀석이 내야 합니다. 나는 반성문 같은 후회의 말들은 들어만 주고, 희망을 조금씩 나눠서 줘서 미련을 못 버리게 해야겠습니다. 밤이 더욱 깊어, 그리움에서 이어진 자책을 시작되면, 말리지는 않고 그냥 방관만 하다가 빈 술잔만 수시로 채워줘야겠습니다. 그리고 또 쏟아질 장맛비를 보며, 공짜 술에 취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마음을 다해 기도해 봅니다.
‘내 영혼의 친아버지시여!
때로는 예견적 기적을 행하시는 나의 하나님.
그 녀석이 어차피 헤어질 거면, 이왕이면 오늘 헤어지게 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