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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토루 Oct 03. 2023

여름 장마의 시작

헤어져라 헤어져라 오늘 헤어져라


쏴~~ 하고 갑자기 비가 내립니다. 장마니까. 장맛비답게 무섭게 내립니다. 손님들은 갑자기 쏟아지는 비에 모두들 식사를 멈추고 한동안 창밖을 봐요. 다시 한두 분씩 딸그락딸그락. 비가 조금 잦아들었을 때 나가시려는지 평소보다 천천히. 저는 내리는 빗소리와 그릇에 수저가 부딪치며 내는 소리가 듣기 좋아요. 라멘을 먹던 꼬마의 하얀 목덜미에서 땀이 맺히는 게 보입니다. 그래서 저를 향해 있던 선풍기를 돌려서 바람을 보내요. 시원한 바람이 닿자. 아이는 깜짝 놀라서는 수줍은 목소리로 “고맙습니다”


장마에도 찾아온 손님들


손님들이 요리하는 모습을 훤히 볼 수 있는 오픈 주방은 여름엔 덥고 습한 구조입니다. 특히 육수가 끓고 있는 불 앞의 저는 항상 젖어 있는.  뭐랄까... 정열적인 에스파냐 한 느낌의 섹시남 '까를로스' 이랄까. 비가 언제 그랬냐는 듯 뚝 그치고 식사가 끝난 손님들은 하나 둘 돌아갑니다. 저도 밖으로 나가 봐요. 파라솔들은 일제히 차렷! 어느새 카페 사장님들이 다 접어 놓으셨네요. 잠깐 내린 비가 이 여름의 열기를 식혀서 인지 시원한 바람이 불어요. 길 한편에 서서 허수아비처럼 양팔을 벌리고 고개를 하늘로 쳐들어요. 눈을 감습니다. 그리고 목덜미로, 겨드랑이로, 반바지 사이사이로 개운한 바람이 지나가는 걸 느낍니다. 바람이 물결치는 넓은 들판도, 바다 한가운데 떠있는 유람선의 뱃머리도 아니지만 혼자서 그렇게 영화 속의 주인공이 되어 봅니다. 그 진짜 이유를 알고 보면 부산 달동네 출신의 자영업자 '김덕배'씨의 조금 안쓰러운 모습이지만요.


마을버스가 바람에 건조된 제 앞에 정지합니다. 엄마 품에 안긴 아기가 창밖의 저를 향해 하이~합니다.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나도 하이~ 아이가 잇몸을 드러내고 웃습니다. 그제야 엄마가 창밖을 두리번거리고, 저는 시치미를 뚝. 버스는 다시 출발해요. 습기 때문인지 저의 곱슬 머리카락은 더욱 곱슬거립니다.


식사 후 손님이 포개어 올려 놓은 그릇


가게로 돌아오니, 손님들은 모두 돌아가고 가지런히 포개져 있는 그릇, 쌓아 올린 물컵, 정돈된 의자와 테이블. 저는 기분이 좋아져서는 맥주 한 병을 꺼내 제 자리에 앉아요. 앗! 그런데 아까 아이를 향하게 했던 선풍기를 다시 제가 있던 방향으로 돌려놓으셨네요. 저도 속으로 ‘고맙습니다’ 오늘은 씁쓰레한 맥주가 입속에서 더 감기는 것 같아요.


장마가 시작되었으니 한동안 손님이 뜸할 것 같아요. 그래서 버리려고 했던 청바지는 좀 더 입고, 갖고 싶은 운동화는 다음 달에 사야겠습니다. 오후에는 밥을 조금만 하고, 바닥 청소는 내일로 미뤄도 될 것 같아요. 내일도 비가 올 테니 퇴근할 때 우산 꽂이는 들여놓지 말고, 이웃 가게 그늘막을 넓게 펼쳐 놔야겠어요.


오늘 불쑥 친구가 말도 없이 찾아와서, 술 먹자고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마침 그놈이 최근에 설익은 만남을 가지던 여자와 헤어져서, 속상해서, 혼자 있기 싫어서 날 계속 붙잡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그러니까. 술값은 당연히 그 녀석이 내야 합니다.  나는 반성문 같은 후회의 말들은 들어만 주고, 희망을 조금씩 나눠서 줘서 미련을 못 버리게 해야겠습니다. 밤이 더욱 깊어, 그리움에서 이어진 자책을 시작되면, 말리지는 않고 그냥 방관만 하다가 빈 술잔만 수시로 채워줘야겠습니다. 그리고 또 쏟아질 장맛비를 보며, 공짜 술에 취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마음을 다해 기도해 봅니다.


‘내 영혼의 친아버지시여!

때로는 예견적 기적을 행하시는 나의 하나님.

그 녀석이 어차피 헤어질 거면, 이왕이면 오늘 헤어지게 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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