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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하고 아름다운 May 15. 2019

하는 일은 일러스트레이터

직업으로서 일러스트레이터


직업이란 무엇인가?

직업이 무엇인지 검색해 봤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자신의 적성과 능력에 따라 일정한 기간 동안 계속하여 종사하는 일.

이렇게 쓰여 있다. 그렇다면 나 스스로를 일러스트레이터라고 말하는 것은  하는 일( work ) 일뿐

직업(job)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월급이 나오지 않는 직업을 탓할 곳은 없었다. 프리랜서는 능력이 수입과 비례하니까 탓할 곳은 나였다.

사장이 월급을 체불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나는 그저 손님을 기다리는 맛없는 변두리 가게의 그냥 그런 식당의 사장 같았다. 인테리어는 철 지난 체리목의 촌스러움을 숨기려고 이것저것 가져다 놓은 콘셉트를 모르겠는 어수선한 그런 곳.

셀 수 없이 많은 자기혐오와 자기 연민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동안에도 밥은 먹어야 했고 전기세 수도세도 내야만 했다.

겨울엔 가스요금이 밀렸고 공과금이 2달 이상 밀리면 공급 제한 스티커가 붙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며칠 후부터는 전기가 가스가 끊긴다는 것이다. 가장 넉넉한 곳은 핸드폰 요금이었다. 끊긴다고 계속 연락은 오지만 쉽사리 끊지는 않았다. 끊겨도 거는 것은 할 수 없어도 받는 것은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놀고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여기저기에서 수업도 계속했고, 아르바이트도 했고, 나라에서 하는  지원사업도 제출했고, 간간히 들어오는 일들로도 바빴다.  예술인 복지재단과 주민센터 사이를 오가며

내가 얻은 것은 나는 지원사업계획서를 쓰는 능력이 없는 것과 머리가 나쁜 나를 더 미워할 수 있는 또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는 것이었다. 나라에서 자비를 베풀어 주는 돈을 받기 위해서는 모멸감과 수치가 따른다는 것도 배웠다.

동사무소에서는 선생님 같은 분은 여기 오시는 거 아니라고 하기도 하고, 이런 건 선생님 같은 분은 하시기 어려워요라며 자세히 모든 것에 대해 설명하지도 않았고, 사회복지사는 거짓으로 작성하면 안 된다며 의심의 눈초리와 주의를 주기도 했다. 집으로 찾아와 내가 진짜 가난한지 거짓 가난을 연기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온 구청 직원이 주차관리 아르바이트라도 하라며 알려주었다. 왜 주차 관리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눈빛은 내가 살면서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가 가고 나서 나는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기 어려웠다. 나를 미워하느라 그를 원망하느라 너무 바빴다.


마음이 바빴다. 그래서 무엇에도 쉽게 집중하기 힘들었던 거 같다. 이 걸해도 저 걸해도 돈 걱정에서 헤어 나올 수 없었고 내가 다른 걸 하게 되면 그림으로부터 영영 멀어지는 것도 무서웠다.

나를 구성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하는 일이 곳 나이고 그게 없어지면 나의 존재 이유도 불명확해지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나는 그렇게 관문을 거쳐 차상위계층이라는 타이틀을 땄고 그 타이틀로 내가 받을 수 있는 복지는 현실적인 도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내가 감수해야하는 감정과 움직임으로 얻은것은 1년에 5만원짜리 문화생활 바우처였다. 

 어느 날 문 앞도 아닌 1층 현관에 덩그러니 커다란 김치 상자 하나가 놓여있었다. 내 이름이 적혀있었다. 무슨무슨 교회에서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김치를 나누어 주신 것이다. 얼마나 감사한 일지 모른다.

"아니 누가 김치 달래?"

 나는 화가 났고 그 김치 박스의 크기는 혼자 사는 내가 가지고 있는 작은 냉장고 보다도 컸다. 넣을 곳이 없었다. 우리 집에 그 커다란 상자를 넣기만 해도 집은 꽉 찰 것만 같았다. 나는 김치를 자주 먹는 편도 아니기에 준다면 손바닥만 한 작은 통 하나면 충분할 텐데. 얼마 후 또 다른 박스가 1층 현관문 앞에 있었다. 그것 역시 내 앞으로 온 상자였고 안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자서전+자기 계발 서류의 도서가 10-20권 정도 있었다. 출판사도 알 수 없는 그런 책들이었다. 물론 새책이었지만 하나도 고맙지 않았다.

나에게 전혀 필요없는 물건은 곧 쓰레기였다. 내 주소와 이름만 떼어내고 재활용 통으로 넣었다.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에게 무언가를 주며 자기만족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들이 고마워 하기를 기대하는 것 같았다. 주소를 맘대로 알려준 동사무소의 행동에 짜증이 났고 앞으로 아무것도 받고 싶지 않으니 보내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왜 그러시냐 뭐 필요한 거 없으시냐 물었지만 설명할 마음도 생기지 않았다.


아무도 나를 이해해주거나 공감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만나서 나를 숨기는 것도 싫었고 그래서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점점 사람들이 불편하고 싫어졌다.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말하는 친구는 그렇게 말하고 가족들과 유럽여행을 갔고, 내가 궁금하거나 알고 싶지는 않지만 교회에 나오라는 지인을 대할 마음의 아량은 없었다.

나의 상황을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쉽게 하는 위로의 말들은 회의적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내가 왜 못 나가는지 왜 그걸 못하는지 등의 이유를 설명하지 않기로 했다.

돈도 없는 주제에 뭘 하기까지 한다 사람들이 말하는 가난에 대한 생각을 듣는 것도 힘들고 반박하고싶지도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고 평생을 살 수 있는 그들의 때묻지 않은 순수함이 부러웠다.

 가난 사람은 의견도 취향도 무엇도 없어야 하고 그저 보이지 않는 곳에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는 나약하고 무해한 존재로 보이지 않기를 바라는 듯 들렸다. 도와주면 감사해야지 이런저런 걸 요구한다라는 그런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 걸 보는 것도 힘들었다. '박스 줍는 할머니는 사실 건물 주래'라는 말처럼 진짜 그들의 현실은 알고 싶지도 않고 현실을 지워 버리는 말들은 생각보다 늘 가까운 곳에서 들려왔다.


나는 그렇게  관보다는 조금 큰 집에 누워  윗집 남자의 오줌 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깨어 일어났다가 그대로 누워 있는 일 말고는  별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일러스트레이터라고 말은 하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아닌데 그렇게라도 나를 어디에 붙잡아 놓지 않으면 그냥 나는 더 아무것도 아닌 게 될까 무서워하기만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은 휴식도 아니고 기운이 없는 그냥 아무것도 아닌 날일 뿐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 생각을 하다 보면 하루가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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