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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lly Jun 23. 2023

비망록 Vol.11 통치의 어려움

불안함과 경계의 결과

오늘은 오스만 제국(현 튀르키예)에서 1800년대 말~1900년대 초에 일어난 아르메니아인 학살 사건에 대해 정리해 보겠다.


현대에 들어 처음 일어난 조직적/계획적 학살이라 불리기도 하지만 튀르키예 측은 계회성과 조직성 둘 다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는 사건들이다.


아르메니아인에 대한 경계의 시작

다민족 국가였던 오스만 제국은 종교에 따라 세금 정책이나 징병 제도 등에 차이가 있었다.


땅이 넓어 이런 일종의 지방자치제가 유효했으나 어딘가에서 반란이 일어나거나 제도가 흔들리기 시작하면 통제를 못하게 되는 단점이 있었다.


다민족 국가인 오스만 제국에서 무슬림과 기독교는 나름 공평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러시아가 아르메니아인들에게 반란을 일으키게끔 선동하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고 이에 대해 중앙정부는 아르메니아인들을 경계할 수밖에 없어졌다.   



몇 번의 충돌과 학살

1894년에는 아나톨리아 반도 동부에서 오스만 제국 정부와 아르메니아인의 무력 충돌이 일어났다.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아르메니아인에 의한 시위였다.

이 시위는 영국, 프랑스, 러시아의 삼국이 요구하고 있었던 행정적인 개혁을 오스만 제국 정부가 이행에 옮길 것을 요구하는 시위였다.


하지만 아르메니아인들의 이런 주장을 정부 측은 외부에서 가해지는 압력으로 인지하고 탄압하려 하다 충돌이 일어나게 되었고 이 충돌로 인해 약 2만 명의 아르메니아인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한다.


그 후에도 크고 작은 충돌, 학살들이 일어나 중앙 정부와 아르메니아인의 대립 관계는 더 깊어졌다.


1913년부터 다시 나라가 전체적으로 "튀르키예 민족주의"쪽으로 기울어지고 러시아의 간섭도 심해지자 중앙 정부는 러시아 군을 지지하는 추세인 아르메니아인을 나라에서 쫓아낼 필요성을 주장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내놓은 계획이 아르메니아인 강제 이주였다. 그 방법은 시리아 사막에 위치한 수용소까지 도보로 이동시키는 것이었고 말 그대로 이 방법은 살인적이었다.


이 가혹한 행진 중에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고 남성들은 한 군데로 모아서 살해되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중앙 정부 측은 학살로 인정을 안 했고 현재 튀르키예 정부도 부정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래서 희생자수나 희생자가 나온 경위 등도 공식적으로 밝혀지지 않았다.


2021년에는 미국 바이든 대통령이 이 사건에 대해 학살이었음을, 즉, 조직적이고 계획적이었다고 선언하기도 했지만 당시 튀르키예 외교부는 크게 반발했다고 한다(Newsweek 기사 참고 https://www.newsweek.com/turkish-official-slams-biden-calling-atrocities-against-armenians-genocide-1586202).




튀르키예 측이 인정하고 반성하는 자세를 보인다면 모를까 미국이 학살이다 아니다를 판정하는 게 크게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희생자수나 정확한 사건 경위 등을 알려면 튀르키예 정부가 어느 정도 조사를 추진하는 자세를 보일 필요는 있지 않을까 싶다.


조직적이지 않더라도 많은 민간인이 희생된 건 맞고 그 배경에는 아르메니아인과의 대립관계가 있었던 건 확실하기 때문에 역사 교육을 위해서라도 조사가 잘 진행되었으면 한다.



이 사건을 보고 있으면 통치라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아니면 통치 그 자체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나타나는 사람들의 욕심을 억누르기가 어려운 것일 수도...)

 

개인의 문제라면 "사이좋게 지내자"는 말까지는 못 해도 "알아서 각자 잘 지내자"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재산"이나 "영토", "종교" 문제가 얽히면 정치가들은 불안에 떨고 의심으로 가득하게 되고 결국 무기를 들게 된다(그리고 이 사건의 경우에는 러시아의 존재도 크다).


하지만 그 충돌에 희생되는 건 가만히 두기만 하면 "알아서 잘 지내고 있는" 시민들이다.

세상의 부조리함을 다시 한번 느끼는 것 같고 많이 시간이 지난 사건이기는 하지만 19-20세기 부(負)의 유산으로서 잘 기억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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