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집안 출신이었던 니콜라에 차우셰수크(1918-1989)가 활발한 공산주의 운동 끝에 공산당 대표가 된 건 1965년이었다.
초반에는 보도와 관련된 검열도 완화시키고 표현의 자유를 인정하는 등 동유럽 중에서는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를 조성했으나 1971년 중국과 북한을 방문하면서 "개인숭배"에 충격을 받아 정치의 방향이 전체주의로 바뀌었고 아내 엘레나도 72년에 공산당 간부로 두었다.
차우세스쿠가 먼저 지향한 건 노동력의 확대였다. 이를 위해서는 인구를 늘리는 정책이 필요했는데 자녀가 없는 부부에게는 높은 세율의 소득세를 과하거나, 5명 이상의 자녀가 없는 여성에게는 피임약을 판매하지 않는다는 등 다소 극단적이었다.
심지어 출산 촉진이 아이를 위한 것이 아니라 노동력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태어난 아이에 대한 복지가 충분하다고 할 수 없어 고아나 HIV 감염률도 증가했다.
경제면에서는 차우셰스쿠가 다른 나라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게끔 선진 공업에 힘을 주어 어느 정도 성과를 냈었다. 또한 석유생산국이었기 때문에 이 부분에서 특별히 다른 나라에게 의존할 필요가 없었고 수출로 인한 경제 성장도 있었다.
하지만 8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 경제 성장으로 인해 더 많은 석유가 필요하게 되어 수입에 기대게 되었고 그 와중에 4차 중동전쟁이 일어나 수입이 어려워지면서 조금씩 국내 경제가 피폐해 갔다.
〇독재 정권의 최후
89년 12월, 차우셰스쿠는 루마니아 동부 티미쇼아라에서 반정부 활동가인 헝가리계 목사의 추방 명령을 내렸다. 이에 대해 교구 내 주민들이 항의했고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주민들 60명 이상이 사망했다.
티미쇼아라의 위치
이런 충돌과 어려워진 삶 때문에 주민들의 불만이 쌓인 상태였지만 차우셰스쿠는 아직도 자신이 지지를 받고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고 12월 21일에 수도에서 집회를 연다.
곧바로 폭죽 소리가 터지고 차우셰스쿠를 규탄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고 치안부대가 그런 시민들에게 발포 및 고문을 가해 광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하지만 항의는 계속되었다.
차우셰스쿠 부부는 국방부 장관에게 항의자의 사살을 명령하지만 장관은 국민을 사살할 수 없다며 거절, 바로 자살한다. 차우셰스쿠는 다시 연설을 시도해 보기도 하지만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꼴이 되었고 결국 그들은 군부대, 공산당까지 적으로 돌린 채 도망갔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군에 의해 구속되었다.
부부는 특별 군사 법정에 서게 되고 즉시 사형 선고를 받아 처형 영상이 전 세계적으로 공개되기도 했다. 시위가 일어난 후 9일 만에 사형이 집행되었다.
언제였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안 나지만 10대 때 루마니아와 관련된 프로그램을 봤었고 처형 영상의 일부를 봐서 충격을 받았다. 말로는 많이 들었어도 독재자의 최후를 본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대통령 부부의 위엄도 없는 겁에 질린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이 재판과 처형에 대해서는 공정하지 않았다는 비판도 있다.)
벌써 몇 명의 독재자들이 비슷한 최후를 맞이하고 있는데도 또 이렇게 지나친(혹은 일그러진) 권력 욕심을 숨기지도 못하고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정치가가 나타난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러 의미로 강력한(?) 지도자의 등장을 막기가 어려운 이유도 어느 정도 납득이 가능하다.
이런 독재자가 사라진 다음 그 당시에 이룬 만큼의 경제 성장을 이루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결국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 그 시대를 약간의 미화를 더하면서 그리워하고 비슷한 정치가를 원하게 된다. 실제로 2009년에 루마니아에서 진행된 여론 조사에서는 당시에는 고용의 기회라도 있었다며 특히 농업 종사자의 40프로가 차우셰스쿠의 정치를 좋게 평가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도 어느 정도 목소리를 내는 기회는 있어야 할 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다시금 선거 등을 통해 의사를 표시할 기회, 다각도에서 취재된 보도에 접할 기회가 있는 사회에 대한 감사함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