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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현 Oct 12. 2021

출간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탕수육은 시켜주겠지?’

‘당연하지. 법카로 긁을 텐데.’

지금 우리가 출판업계에서 일하는 편집자를 만나러 가는 중이라는 건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무언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그보다는 약속 장소가 중식당이라는 사실이 더 직접적으로 와닿았고, 간만에 탕수육을 얻어먹을 수도 있겠다는 기대가 먼저였다. 도착한 건물 1층에서 출판업계의 아우라를 뿜으며 우릴 반기는 그를 보고 나서야 오늘 만나려는 사람이 우리가 한 번도 가 보지 않았던 세상에서 내려왔고, 우리를 그의 세상으로 인도할 수 있는 권능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깨달음이 밀려왔다. 나도 모르게 두근거렸다. 그제야 실감이 됐다. 어쩌면 아내가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책을 출간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함께 들어간 중식당에서 그가 탕수육을 시켜주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의 추천으로 시켰던 음식의 이름이 뭐였는지 맛이 어땠는지도 아내와 나의 머릿속에 남아있지 않다. 그의 아우라는 아내와 나를 지배했고,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어느 종교 지도자의 귀한 말씀인 양 집중하도록 만들었다. 단편적인 기억으로만 남아있는 중식당의 모습이나 음식과는 달리 그의 표정, 몸짓, 그가 했던 말들은 아직도 또렷하다.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궁금했던 것들을 아내에게 쏟아냈다. 은퇴를 결심한 계기와 준비한 과정, 은퇴 이후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모습들을 물었다. 입사 면접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내가 대답하는 내용보다 아내의 말을 듣고 있는 그의 표정에 더 신경이 쓰였다. 지루한 표정이면 안되는데. 따분한 표정이면 어쩌나.


식사하는 것도 잊은 채 질문과 답을 주고받는 중간중간, 내가 궁금했던 것들을 끼워 넣었다.

‘손익분기점이라고 해야 하나요? 몇 부 정도 팔려야 출판사가 손해를 안 보는 건가요?’

편집자는 상황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대략 3,000부 정도가 팔리면 출판사로서는 본전이라 이야기했다. 편집자의 말에 ‘아 그렇군요.’하며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3,000부가 많은 건지 적은 건지, 그 정도의 책을 판다는 게 어느 정도나 어려운 건지 쉬운 건지 머리에 바로 들어오지는 않았다.

‘근데, 출판사 손해를 물어보시는 분은 처음이에요.’

편집자는 아내의 글에서 묘사된 걸로 상상했던 내 모습이 이제 조금씩 눈에 보이는 것 같다는 말도 함께 덧붙였다. 아니. 보통 이런 것 궁금하지 않나? 난 이게 제일 궁금했는데.


작가를 섭외하는 것은 편집자의 일이라 했다. 주로 잡지나 신문에 기고된 칼럼을 살피고, 브런치도 가끔씩 기웃거린다고 했다. 간혹 출판사의 방향과 맞지 않아 출간을 하지 못하는 아까운 글을 다른 출판사에서 일하는 편집자로부터 소개를 받기도 한다고 했다. 출간을 결정하는 건 작가의 글이 흥미와 관심을 끌어내는가가 가장 중요하고, 글을 잘 쓰지는 못하더라도 추후 교정, 교열을 통해 다듬을 수 있으니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했다.

‘혹시 편집자님. 본인의 책을 내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드세요?’

관심이 있으니 출판업계에서 일을 하는 걸 테고, 이 업계를 잘 아니 마음만 먹는다면 자신의 책을 기획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껏 많이 들어본 질문이었는지 그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나중엔 어떨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책을 내고 싶은 생각이 없다고 했다. 그는 자신이 기획하고 다듬은 책이 잘 팔려 다음 쇄를 찍어낼 때 가장 기쁘다고 했다.

‘저는 작가님들 쇄 먹여주는 낙으로 살아요.’

아. 쇄는 먹여준다라고 표현하는구나.


아직 궁금한 게 많이 남았는데 그가 자리를 정리하며 일어났다.

‘이제 출판사로 가시죠. 계약서 보여드릴게요.’

계약서라고? 아니. 이렇게나 빨리? 우리 만난 지 이제 겨우 한 시간 정도 지났을 뿐인데. 이미 다 결정된 거였어? 이 분 일처리가 마음에 들었다. 성격이 급한 게 아내를 꼭 닮았다.




책이 꽂혀도 있고 쌓여도 있고 널브러져도 있는 출판사는 조용했다. 편집자는 입구 맞은편 회의실로 우리를 안내했다. 종이책 냄새가 가득했다. 이곳에서 회의를 하며 아내의 책 출간을 결정했으려나. 편집자가 출력된 계약서를 들고 와 아내에게 내밀었다. 계약서는 ‘출판권 설정 및 기타 저작권 사용 계약서’라고 쓰여있었고, A4용지 네 장에 걸쳐 상세한 내용이 적혀있었다. 출판업계에서 사용하는 전문용어들이 한가득 담겨있는 계약서에서 가장 눈에 먼저 들어온 건 ‘책 정가의 10% 를 저작권자에게 지급한다’는 내용이었다. 초보 작가의 인세가 10%라니. 이 분들, 후하기도 하여라. 이름 난 작가가 되면 인세가 더 오르는지 물었다.

‘아뇨. 저희는 유명 작가나 초보 작가 모두 10% 드려요.’


계약서에는 출판권, 저작권, 편집권, 저작인격권, 판면권  각종 권리들이 어지럽게 나열되어 있었다. 읽기만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다 단번에 내용을   있는 조항이 . 12. 재해 등의 처리에 관한 항목이었다. ‘천재지변이나 전란, 화재 등의 불가항력의 일이 발생할 경우, 출판사는 책을 발행하지 않아도 된다.’ 어찌 보면 당연한 건데도 그냥 지나쳐지지 않았다. ‘시련이 닥칠수록 더더욱 책을 통해 이겨내야지.’라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이내 마음을 진정시켰다.  힘내서 일해보자는 희망의 이야기라면 모를까,  이상  하지 않겠다는 은퇴 이야기가 시련의 시기에 굳이 필요하진 않을 테니. 아내의 책이 나오기 전까지 천재지변, 전란, 화재만 피하면 된다.

 

2021년 3월 9일, 기억이 가물가물한 점심을 먹고 난 오후, 아내는 출간 계약서에 사인을 했고, 난 그 모습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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