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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현 Oct 21. 2021

댓글은 하나같이 날이 서 있었다.

‘요즘 한국 책이 대만에서 많이 출간돼요. 저번에 우리 쪽에서 나온 책도 곧 대만에서 출간 될 예정이고요.’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출판사를 나와 집으로 가면서 우리는 들떴다.

‘아까 들었어? 대만이래. 대만.’

아내의 책도 대만으로 갈 것이라는 단 한마디의 언급도 편집자는 하지 않았는데, 우리의 상상은 이미 대만에서의 책 출간을 넘어 타이베이 도심 한복판에서 열리는 팬 사인회까지 나가 있었다.

‘퍼스트 클래스로 끊어 주려나?’

‘그럼! 작가님 모시려면 퍼스트 클래스가 격이 맞지.’

능숙하게 휘갈겨 멋들어진 사인은 대만의 출판사에서 예약해 준 별 다섯 개짜리 호텔에서 무료로 제공되는 룸서비스와 함께 연습하면 되겠다고 했다.

‘대만에서 잘 되면 중국으로도 퍼진다잖아.’

편집자는 같은 한자문화권이어서 대만에서 출간된 책은 중국으로도 쉽게 진출한다는 말도 했었다.

‘중국에서는 풍기문란 때문에 금서로 지정될지도 몰라. 너 책, 일 안 하겠다는 내용이잖아.’

‘그럼 입국 금지되려나?’

‘입국 금지당하기 전에 중국 여행 한번 다녀와야겠다.’

허무맹랑하고 황당무계한 상상은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날개를 달고 한 없이 날아올랐다. 우리가 미처 중국 여행을 하기도 전에 아내가 입국 금지를 당하면 나 혼자서라도 다녀와야지 하는 다짐도 빼놓지 않았다.




계약서에 사인을 한 날은 낯선 동네에서 살아보자며 제주로 떠나기로 예정한 날로부터 불과 2주 전이었다. 꼼짝없이 아내는 제주에 있는 두 달 내내 글을 써야 했다. 당장 4월, 신문에 실릴 4,000자 분량의 글 한편을 보내야 했고, 7월로 출간이 예정된, 아직 전체의 윤곽도 잡히지 않은 책의 뼈대를 잡고 살을 붙여야 했다. 밥을 먹고, 산책을 하고, 일주일에 두어 번 올레길을 걷는 것 정도만 빼고는 아내는 대부분의 시간을 글을 쓰며 보냈다. 밤 11시, 12시가 넘도록 글쓰기를 놓지 않았다. 이제는 맥주 한 캔 먹으며 같이 이야기 좀 하다 잠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아내의 눈치를 보는 것이 매일 늦은 밤 내가 하는 일이었다.


첫 신문 연재 날인 4월의 셋째 주 토요일, 신문을 파는 곳을 찾는 건 쉽지 않았다. 지나가다 보이는 편의점마다 구석구석을 살폈지만, 신문은 보이지 않았다. 신문을 사 본 기억도 20년은 된 듯했고, 손에 신문을 들고 다니는 사람을 본 것도 가물가물했다.

‘시외버스 터미널 쪽을 가볼까? 거긴 있을지도 몰라.’

아내의 글이 아내의 이름으로 종이에 인쇄되어 판매되는 첫 번째인데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제주 전체를 뒤져서라도 손에 쥐어야 했다. 제주 시외버스 터미널 한쪽의 허름한 작은 가게에서 드디어 신문을 발견했다. 한겨레신문 토요판이라고 적혀있는 상단에 아내의 흑백사진과 함께 아내가 쓴 글의 제목이 보였다. 신문 한 부의 가격은 1,000원이었다. 값을 치르고 그 자리에서 신문을 든 채 몇 장 넘겨 아내의 글을 찾았다. 아내와 내가 함께 캠핑의자에 앉아있는 뒷모습의 사진이 신문 한가운데에 박혀 있었고, 인쇄된 아내의 글이 그 사진 주변으로 신문을 가득 채웠다.

‘한 부 더 사자.’

우리가 몇 번이고 읽어 볼 신문 한부와 평생 간직할 신문 한부를 챙겨 시외버스 터미널을 나왔다.


신문으로 인쇄되고 신문사 홈페이지에 올라가는 게 전부인 줄 알았지 아내가 쓴 글이 포털사이트의 뉴스 한자리를 차지할 줄은 몰랐다. 신문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아내의 카톡이 울렸다. 인터넷으로 글을 읽은 아내의 친구였다.

‘너 기사 난 거 읽었어. 너 맞지?’

핸드폰을 꺼내 포털사이트를 열었다. 많이 본 뉴스의 가장 높은 자리에 아내의 글이 있었고, 기사에는 이미 수백 개의 댓글이 달려 있었다.


글은 아내가 썼지만, 기사의 제목을 정하는 건 신문사의 몫이었다. 도발적인데 가볍기만 한 제목이었다. 젊은데 왜?라는 질문을 던지고 젊으니까!로 대답하는 제목은 자극적이었다. 전날 기자로부터 이 제목으로 기사가 나갈 것이다라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너무 낚으려는 거 아냐? 하며 마치 남 일인 듯 넘겼었다. 자극적인 제목은 사람들의 클릭을 불렀고, 댓글이 쌓이고, 많이 본 뉴스 1위가 되었다. 댓글의 내용은 험했다. 브런치의 댓글처럼 훈훈하지 않았다. 하나같이 날이 서 있었다. 이런 반응일 거라는 걸 예상했어야 했는데, 처음이어서 미처 마음의 준비를 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평범한 이들과는 다른 길을 가려는 삶을 비난했다. 조금은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있다는 걸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싸늘한 댓글 하나하나에 해명을 하고, 충분히 설명도 해보고, 그래도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그냥 남들과 조금 다를 뿐이라고, 모두가 같을 수는 없지 않으냐고 생떼를 부리고도 싶었지만, 그 시간에도 날이 선 댓글은 계속 늘어만 갔다. 우리의 선택을 응원한다는 댓글도 간간히 눈에 띄었지만, 시선을 오래 붙잡지는 못했다.


제안을 받고, 편집자를 만나고, 계약을 하고, 글을 쓸 때까지만 하더라도 울타리 안에서의 과정이었다. 자신의 글이 세상 밖으로 나온다는 건 울타리 밖의 거센 비바람을 온전히 혼자의 힘으로 받아내야 한다는 걸 의미했다.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고, 스스로 알 수도 없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나간 세상에서 흠뻑 젖고 나서야 울타리 밖이 만만치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아내는 저녁 내내 움츠러들었고, 나 역시 글을 쓰기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해 회의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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