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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현 Nov 15. 2021

편집자와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8주를 쏟아부어 완성한 10만 자의 초고를 떨리는 마음과 함께 출판사로 보내고서야 아내는 숨을 돌렸다. 아내 스스로 성에 차지 않아 뜯어고치고, 첫 독자였던 내 의견을 더해 다듬은 초고였다. 두 달을 살아보자며 온 제주, 그 좋은 봄날에 아내는 글만 썼다. 제주 곳곳에 지천인 노란 유채꽃길은 아침 달리기를 하며 잠깐 보는 걸로 달래고, 일주일은 족히 즐길 수 있는 녹산로의 벚꽃길도 딱 하루만 시간을 내어 다녀왔다. 그 덕에 책의 마지막 에필로그에 ‘제주에서 쓰다.’라는 문구를 넣을 수 있었다.




글쓰기를 마친 아내는 더 이상 원고를 쳐다보지 않았다. 책에 대한 언급도 하지 않았다. 8주간 파묻혀 있었던 원고 더미에서 벗어나 애당초 글과는 인연이 없는 사람인 양 책도 글도 멀리 했다. 프로젝트를 끝내고 보상으로 받은 휴가를 즐기듯, 아내는 며칠 남지 않은 제주의 봄을 즐겼다. 그렇게 2주의 시간이 지나고, 편집자의 피드백이 왔다.

 

아내가 2주간의 여유를 즐기는 동안 편집자는 아내가 보낸 원고 이곳저곳에 코멘트를 쌓았다. 조금 더 살을 붙여야 하는 부분, 반복되어서 걷어내야 하는 부분, 끊어지는 글 흐름을 부드럽게 이어야 하는 부분들에 표시를 하고 간단한 설명을 덧붙였다. 직접 쓴 글에 대해 처음 받아보는 지적에 아내는 당황했다.

‘퇴사를 마음먹은 부분은 내가 강조하려고 한번 더 반복한 거거든.’

‘연금 설명한 부분은 너무 늘어지는 것 같아서 짧게 친 건데.’

아내는 나에게 하소연을 했다. 나 역시 거들었다. 대 여섯 번을 넘기면서부터는 좀 대충 읽기는 했지만, 어쨌든 나도 열 번이나 읽으며 의견을 건넸고, 그렇게 몇 번이고 매만져진 글이었다.

‘그러게 말야. 정독한 거 맞나?’


편집자와의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었다. 성을 쌓고, 커다란 돌로 성벽을 두르고, 성벽 가장 높은 곳에서 단단히 무장을 한 채로 편집자의 공격을 맞이했다. 편집자는 이미 몇 번이나 다른 사람의 성을 공격한 경험으로 노련했다. 성벽의 허술한 부분을 손쉽게 찾아냈고, 그런 곳들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저런 곳도 있었나. 저긴 왜 저리 방비가 안되어 있을까 하는 곳들을 놓치지 않았다. 공격으로 헐거워진 곳을 급히 보수하고 정비하며 다음 공격을 대비했다. 성이란 것을 처음 쌓고 방어하는 아내가 편집자의 끊임없는 공격을 받아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 전쟁이 몇 차례 계속되었고, 부서진 곳을 다시 쌓고, 보수하고, 올리면서 성의 모습은 처음 쌓았을 때의 모습과 달라졌다.


처음의 모습과는 달라졌다 하더라도, 아내의 손으로 직접 쌓고, 올린 성이었다. 아내의 글이었고, 아내의 문장이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편집자는 공격을 멈추고는 성 안으로 들어와 허술한 부분을 직접 고치기 시작했다. 교열 작업이었다.




다시 2주가 지나 편집자가 다듬었다는, 교열작업을 마친 글은 인쇄될 책의 모습으로 디자인된 상태의 PDF 파일로 받았다.

‘신기하다. 이렇게 인쇄되는구나.’

책의 모습을 갖춘 글은 또 다른 느낌이었다. 두 페이지에 걸쳐 챕터가 나눠지고, 소제목에 색이 들어가고, 페이지 번호가 찍혔다. 이렇게 책 작업이 마무리되나 했는데 아내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내 문장 같지가 않아. 읽어 봐. 내 글의 느낌이 아니야.’

편집자의 손을 거친 글은 묘하게 맛이 변해 있었다. 의도를 갖고 짧게 쓴 문장들은 길게 하나로 연결되었고, 일부러 넣지 않았던 접속사가 앞뒤 문장을 잇고 있었다. 아내가 애써 고른 동사나 형용사가 바뀌고, 아내가 잘 쓰지 않는 표현으로 묘사가 추가되었다. 교열작업이라는 게 이런 것이었나. 내가 읽어봐도, 열 번을 읽었던 아내 글의 느낌이 아니었다. 옆에서 표정이 굳어버린 아내도 평소 웃음기 많던 아내의 느낌이 아니었다.


‘내 문장이 별로여서 그런가 보네. 다시 고치지 뭐.’

글을 쓰기 시작한 이후로, 스트레스가 가장 심했던 하루를 견뎌내고, 아내는 화를 식혔다. 아내는 편집자가 수정한 부분을 자신의 문체로 다시 고쳤다. 길어진 문장을 다시 짧게 나누고, 접속사를 넣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문장을 수정했다. 편집자가 추가한 묘사나 표현이 그럴듯하더라도 아내의 입맛에 맞게 바꾸었다. 아내는 그렇게 일주일을 글 속에 다시 파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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