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정된 원고가 첨부파일로 담긴 메일을 편집자와 아내는 여러 차례 주고받았고, 언제부터인가 메일이 답답했는지 편집자와 카톡 친구가 되어 메신저를 이용했다. 원고 마감일이 다가오자 편집자와 아내는 하루에도 몇 번이고 전화 통화를 하면서 원고를 다듬었다. 둘은 마지막까지 치열했다. 그 치열함을 서로가 존중했다. 책의 완성이라는 한 가지 목표를 바라보면서 편집자와 아내는 둘도 없는 동료가 되었다. 그 둘이 만들어낸 결과물은 내 도움을 더할 수준을 이미 넘어서 있었다. 예정한 마감일이 되고, 그렇게 모든 검토가 끝났다.
마지막까지도 손을 쉽게 놓지 못하는 아내에게 편집자는 수정할 사항은 앞으로도 계속 나온다고 했다. 한 번은 끊어가야 하고, 지금 놓친 수정은 2쇄를 찍을 때 다시 또 하면 된다고 했다. 아내는 편집자의 말에 마음을 다잡았다. ‘책에 완성이란 없다. 이 정도면 최선을 다 했다.’의 의미였겠지만, 내 귀에는 무엇보다도 ‘2쇄’라는 말이 먼저 꽂혔다.
‘2쇄라잖아. 출판사에서도 너 책 기대가 큰거야.’
계약서에 적혀있었던 책의 가제는 ‘어떤 은퇴 이야기’였다. 가제일뿐이었다. 원고가 마무리되고 책의 제목을 정해야 할 시기가 되자 출판사는 몇 가지 후보를 아내에게 알려왔다. 출판사는 제목 후보들 중에 ‘야수의 심장은 아니지만, 마흔에 은퇴합니다.’를 밀었다. 강렬했고, 시선을 확 끌었다. 그래도 그렇지. 야수의 심장이라니. 그냥 담담하게 쓴 은퇴 에세이잖아. 아내는 책의 제목에 ‘야수의 심장’이라는 문구가 들어가는 걸 부담스러워했다. 어쩌면 일을 한번 물면 끝낼 때까지 절대 놓지 않는 아내가 스스로 야수의 심장이 ‘아니’라는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고.
아내는 다른 제목 후보로 있던 ‘마흔, 부부가 함께 은퇴합니다.’를 어필했다. 쿨하면서도 담담한 제목을 원했다. 아내의 나이 마흔에, 부부가 함께 은퇴를 준비하고 실행하는 과정이 책의 주된 내용이니, ‘마흔, 부부가 함께 은퇴합니다’라는 제목이 책의 내용을 잘 담고 있다고 설득했다. 나 역시 아내가 고른 제목이 훨씬 나아보였다. 아예 ‘야수의 심장! 마흔에 은퇴합니다.’라면 모를까.
제목으로 한참 의견이 오고 갈 때 표지 디자인이 나왔다. 책의 표지로 디자인된 3개의 후보 이미지 안에는 약속이나 한 듯 부부가 함께 하는 모습이 들어있었다. 함께 달리기를 한다든가, 커피향을 즐긴다든가 하는 모습으로 부부의 여유 있는 일상을 그렸다. 표지 디자인이 나오면서 아내의 의견에 점차 힘이 실렸다. ‘마흔, 부부가 함께 은퇴합니다’라는 제목이 표지 디자인의 부부가 함께 하는 모습과 이미 먼저 은퇴를 한 내 상황이 어우러지는 괜찮은 제목이라는 의견도 출판사에서 하나 둘 나오기 시작했다.
책 제목을 놓고 아내와 출판사 직원들이 참여하는 투표에서 아내가 원했던 제목이 더 많은 표를 받았다. 아내 첫 책의 제목은 ‘마흔, 부부가 함께 은퇴합니다’로 결정되었다. 만약 표지 디자인속 부부의 모습 옆으로 고양이라도 한 마리 그려져 있었다면, ‘야수의 심장’이라는 문구를 달고 책이 나오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실명이냐 필명이냐의 문제도 정해야 했다.
‘나라면 필명을 쓸 것 같아.’
이중적인 삶을 사는 것 같아서 멋지지 않아? 작가로서의 새로운 삶을 새로운 이름으로 시작하는 거지. 김혼비 작가도 장류진 작가도 필명을 쓰잖아. 이름도 특이해서 한번 들으면 잊지 않을 만큼 인상적이고. 그리고 일단 너 이름을 검색하면 국민 트롯 요정이 먼저 나오는데, 앞으로 너가 그 요정을 뛰어넘는다는 건 절대 불가능한 일이야. 필명 쓰자 필명.
‘그런가?’
아내가 설득이 되었다. 필명으로 쓸 이름을 찾기 시작했다. 이름으로 어색하지 않으면서도 흔하지 않은 이름, 검색했을 때 가장 먼저 노출이 되어줄 아무도 선점하지 않은 이름. 그러면서도 정감있고, 한번만 들어도 외우기 쉬운 이름.
‘김이들 어때?’
아내의 브런치 필명인 ‘idle’ 에 아내의 성을 붙이고, 그렇다고 ‘김아이들’은 괜히 서태지가 떠오르니 줄여서 ‘김이들’인 걸로.
‘오 괜찮은데?’
검색을 해봤다. 유명인 중에 ‘김이들’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이제 아내의 책이 나오게 되면, 경쟁자 하나 없이 검색 결과의 최상단에 아내의 이름과 책이 노출된다. 이 기쁜 소식을 출판사에 알렸다. 아내의 작가로서의 이름은 ‘김이들’로 하겠다고. 하지만 출판사는 아내와 나의 즐거운 상상을 단칼에 잘랐다.
‘에세이는 본인의 이야기이니 실명이어야 해요. 그래야 독자들이 진정성을 느껴요.’
‘쳇.’
책 원고를 인쇄소로 넘겼다는 소식을 편집자가 전했다. 윤전기를 통과해 이제 막 잉크가 찍혀 나온, 활자가 가득한 원판 사진도 함께였다. 인쇄가 시작되고 일주일이 지난 7월 22일, 출판사에서 보낸 택배 박스가 집으로 왔다. 떨리는 손으로 박스를 열었다. 이제 막 인쇄된, 종이와 잉크 냄새를 아직 품고 있는 책 20권이 박스에 들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