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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현 Dec 13. 2021

그냥 좋은 책을 만들고 싶은 거예요.

‘은퇴 과정, 은퇴 이후의 삶과 관련한 에세이 글이 저희가 원하는 글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됩니다.’

맞닿아 있다. 내 글이 출판사에서 원하는 글과 맞닿아 있다고 했다. 출간 제안 메일을 쓰며 별생각 없이 선택한 단어였을 수도 있지만, 그 말이 좋았다. 서로 맞닿아 있는 거라면, 출판사의 입장에 따라 글이 휘둘려 원치 않는 흐름으로 갈 일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출간 제안 메일이 반가워 마음이 너그러웠는지도 모른다. 아마 다짜고짜 출간 의향이 있는지부터 물었더라도, 암요. 당연히 있고 말고요. 라며 납작 엎드렸을지도 모른다.


미팅 장소는 합정역 근처의 출판사 사무실이었고, 시간도 점심을 한참 지난 3시였다.

‘점심은 안 사주는구나.’

아내가 출간 제안을 받았을 때, 출판사와의 첫 미팅 장소가 중국집이었다는 게 떠올랐다. 오랜만에 탕수육을 먹겠다며 좋아했던 기억이 났다. 아내에게 출간을 제안한 편집자는 첫 만남에 밥을 사주고 바로 계약서를 내밀었었는데, 내쪽의 출판사는 아직 계약하겠다는 마음을 먹지 않은 건지. 계약이 확정된 게 아니라면 굳이 밥을 사주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별 의미 없는 단서 하나로 몇 가지 걱정이 뻗어나갔다. 출판사에 대한 새로운 데이터가 추가되었고, 지식이 업데이트되었다. ‘모든 출판사가 첫 만남에서 밥을 사 주는 것은 아니다.’


약속한 시간에 맞춰 출판사의 문을 두드렸다. 아내의 출판사와 마찬가지로 조용했고, 종이 책 냄새가 가득했고, 이곳저곳이 책들로 어질러져 있었다. 아내를 따라 처음 출판사에 들렀을 때는 마음이 조였는데, 두 번째여서인지 그때처럼 긴장이 되지는 않았다. 편집자 한분이 책이 쌓여있는 회의실로 우리를 안내했고, 뒤 따라 출판사 대표, 편집장, 편집자가 우리의 맞은편에 앉아 명함을 건넸다.


편집자가 기획의도가 적혀있는 출간 기획서를 내밀었다. ‘무턱대고 현실로부터 도피하라고 권하는 것이 아닌, 은퇴 준비와 은퇴  삶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이라 쓰여 있었다. 기획의도가 마음에 들었다.  생각과 맞닿아 있다는 느낌이 드는 문구였다. 주요 독자층은 ‘직장 번아웃으로 방황 중인 중장년이었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고민하는 2030’으로 독자층이 확산되기를 기대했다. 출간 기획서를 눈으로 훑으며 내려가는데 하단에 유사 도서 항목이 보였다. 유사 도서로 제시한 2권의   하나가 얼마  출간한 아내의 책이었다. 아내도 확인을 했는지 동그레진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어. 이거 아내가 쓴 책이에요.’

놀라서 눈이 커지기는 출판사 분들도 마찬가지였다. 아내의 책 이야기에 딱딱하던 출판사 회의실의 분위기가 단번에 풀렸다.

‘아내분 책 내용이나 글 목차가 작가님의 글과 방향이 달라서 전혀 몰랐어요. 신기하다.’

아내의 책이 세상에 나온 지 이제 열흘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출판사에서 이미 내용을 꿰고 있다는 걸 듣는 것도 기분이 묘했다.   


누그러진 분위기에 용기를 내어 처음 출간 제안이 왔을 때부터 궁금했던 걸 물었다. 출판사가 내고 싶어 하는 책은 어떤 모양새인지. 왜 내 글을 선택했는지. 내 글에 어떤 기대를 하고 있는지.

‘제 글이 잘 팔릴 것 같다는 생각이 안 들거든요.’

스스로 내가 쓴 글이 돈이 될 거라는 확신을 하지 못하는 나를 안심시켜 주기를 바랐다. 내 글을 팔아 보겠다고 먼저 손을 내밀었으니 난 보지 못했던, 출판사의 시선에서만 보이는 무언가가 있는 거라 생각했다. 그게 무엇인지 듣고 싶었다. 질문의 대답은 그때까지 한쪽에서 조용히 앉아있던 편집장이 맡았다.

‘아내분 책 보다 많이 팔릴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

아. 이런 대답이 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렇구나. 글에 대한 의견만 같은 게 아니라, 잘 팔리지 않을 거라는 생각도 같구나. 출판사와 나, 정말 서로 맞닿아 있구나.

‘작가님 글이 좋아서요. 저희는 그냥 좋은 책을 만들고 싶은 거예요.’

 



책을 낼 의향이 있는지 일주일 동안 생각해보고 연락을 달라고 했다. 그때 대표님이 끼어드셨다.

‘무슨 일주일이나 필요해요. 내일까지 결정 해 주실 수 있죠?’

출판사를 나오면서 이곳에서 책을 내야겠다는 마음을 굳혔다. ‘많이 팔릴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다. 다만 좋은 책을 만들고 싶을 뿐이다’라는 말이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바로 함께 하게 되어서 설레고 기쁘다는 문자를 보냈다.


미팅 후 열흘이 지나고 출간 계약서가 등기로 도착했다. 저자는 9월 30일까지 저작물의 완전한 원고를 출판사에 인도하여야 하고, 그걸 받은 출판사는 수정을 거쳐 완성된 책을 12월 31일까지 발행하여야 한다고 적혀있었다.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나와 맞닿아 있는 출판사가 보낸 출간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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