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현 Dec 19. 2021

유퀴즈 아니면 이제 방송 출연은 그만 하자.

원고를 써서 넘기고, 넘긴 원고를 다시 고치고, 뒤엎고, 다듬는 작업을 마치고, 마침내 <마흔, 부부가 함께 은퇴합니다>라는 책으로 인쇄되어 아내의 손에 들어왔을 때, 이제 아내가 할 일은 다 끝났다고 여겼다. 몇 달간 고생한 아내를 토닥였다.

‘고생했어. 이제 한동안 좀 쉬어.’


저자는 글만 쓰면 되는 줄 알았다. 책을 만들고, 홍보하고, 판매를 하는 건 출판사의 일인 줄 알았다. 이제 다 끝이라는 생각은 아내와 나의 세상 물정 모르는 착각이었다. 출판사는 마케팅을 이유로 아내를 세상으로 불러냈다. ‘작가님, 유튜브 인터뷰가 잡혔어요.’, ‘작가님, 방송 섭외가 들어왔어요.’ 얼굴을 노출해야 한다는 것을 아내는 적잖이 부담스러워했지만, 출판사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 출판사는 무명의 신인작가에게 투자를 한 것이고, 책은 아내 혼자의 힘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니, 책을 한 권이라도 더 팔려는 출판사의 입장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저자가 잘 생기거나 이쁘면 책이 더 잘 팔린다던데.’

‘그니까. 그래서 난 얼굴 숨기려고. 그래야 더 잘 팔릴 걸?’

책이 나오기 전 우리가 나누었던 대화는 순진했다. 얼굴을 드러낼지 아닐지는 우리의 선택인 줄로만 알았다. 자신의 이름으로 책을 낸다는 건, 책의 원고를 완성하고, 책으로 인쇄되어 나오는 걸로 끝이 나는 게 아니었다. 그때부터가 다시 또 시작이었다. 무명작가의 이름과 얼굴을 알리기 위한 마케팅. 두 번째 전쟁이 시작되었다.



 

달력에 신문이나 유튜브 인터뷰, 방송 출연의 일정이 쌓였다. 신문에 아내의 인터뷰가 나가면, 유튜브 출연 섭외가 들어오고, 유튜브 영상을 본 예능프로의 방송 작가가 아내를 찾았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식이었다. 방송사는 상암에 많았고, 스튜디오는 일산에 주로 있었다. 덕분에 내가 아내의 매니저가 되었다. 녹화장까지 가는 데에 2시간, 녹화하는 데에 2시간, 집에 돌아오는 데에는 퇴근시간이 겹쳐 3시간 가까이가 들었다. 녹화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하루가 다 지나갔다.


녹화 현장은 바쁘게 돌아갔다. 처음 접한 우리에겐 새롭고 낯선, 궁금할 것이 많은 장소였지만, 그곳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해야 하는 일이 잔뜩 쌓인 일터였다. 간단한 인사만을 나누고 급히 카메라 앞에 서야 했다. TV에서만 보던 연예인들이 아내에게 질문을 건네고, 대답하는 아내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그 모습을 수많은 스텝들과 카메라의 앵글이 지켜봤다. 그들은 아내를 파이어족이라고 불렀다.


은퇴 준비를 하면서 단 한 번도 우리가 파이어족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파이어족이라 불리는 사람들처럼 큰돈을 모으지 못했고 그들처럼 재테크에 능하지 않았다. 하지만 몇 번의 인터뷰와 방송을 거치면서 아내는 어느새 파이어족을 대표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인터뷰나 방송에서는 늘 같은 질문을 했다. 돈은 어떻게 모았는지, 재테크는 어떻게 했는지. 그래서 얼마를 모으고 은퇴하는 건지. 그들의 궁금증은 온통 돈이었다. 돈 이야기는 할 때마다 불편했다.


녹화 시간 내내 불편했던 한 예능프로의 촬영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아내와 나는 꽤 오랜 시간 말없이 침울했다. 프로그램 녹화 전, 방송 작가와 사전 인터뷰를 진행했었다. 대본에 넣을 질문과, 뺐으면 하는 불편한 질문을 추려 방송 대본을 정리했었다. 그렇게 몇 차례 말을 맞추고 난 후, 완성된 대본을 진행자에게 넘겼다. 카메라의 불이 들어오고 녹화가 시작되자 진행자는 미리 작성한 대본을 무시했다. 첫 질문부터 하지 않기로 한 질문이었다. 당황해하는 아내에게 진행자는 애써 걷어냈던 불편한 질문들을 연이어 던졌다. 수십 명의 스텝들이 함께 하는 녹화를 멈출 수는 없었다. 아내는 하지 않기로 한 불편한 질문에 일일이 답을 했다. 아내를 방송의 재미만을 위한 소모품처럼 여긴다고 느껴졌다.

‘이제 그만 하자. 너 할 만큼 했어.’




유퀴즈에 출연했다는 어떤 사람이 올린 녹화 현장에 대한 후기 글을 읽었다. 녹화에 들어가기 전, 떨리는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도록 기다려주고 편안하게 배려해 주었던 유재석에게 무척이나 고마웠다는 이야기였다. 유재석이라서 그런가. 역시 국민 MC는 다른 건가. 지난 녹화에서 아내를 배려하지 않았던 진행자가 떠 올랐다.

‘우리 유퀴즈 아니면 이제 방송 출연은 더 이상 하지 말자.’

이 정도 했으면 충분하다며, 이제 다시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가자며 아내와 농담을 나눴다.


며칠이 지난 저녁, 아내와 호수 산책을 걷고 있는데 출판사에서 전화가 왔다. 또 다른 방송 출연 요청인가 했는데 갑자기 아내의 목소리가 커졌다.

‘아. 정말요? 네. 할게요. 저.’

아니. 더 이상의 방송 출연은 안 하기로 하지 않았나. 출판사의 제안을 덥석 무는 아내가 못마땅했다. 전화를 끊고 나를 쳐다보는 아내를 흘겼다. 아내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출판사와 통화한 내용을 전했다.

‘유퀴즈래.’

응? 유퀴즈? 유재석이 나오는 그 유퀴즈? 정말 거기에서 섭외 요청을 했데? 아내도 나도 그 상황에 어리둥절했다. 쉽게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그럴 일은 없을 거라며 농담처럼 얘기했던 그 일이 현실이 되었다.


아침 9시, 촬영 장소인 강남의 한 카페는 사람들로 붐볐다. 이른 시간인데도 이미 다른 출연자의 녹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스텝 한분이 2층의 대기실로 우리를 안내했다. 녹화가 진행될 때의 간단한 주의사항을 아내에게 얘기했다.

‘질문은 유재석 씨가 주로 하는데, 답변을 하실 때 조세호 씨도 한 번씩 쳐다 봐 주세요. 안 그러면 조세호 씨 민망하시거든요.’

방송 녹화를 위한 간단한 메이크업을 받고 1층 녹화 현장에서 터지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30분쯤 기다렸을까. 방송 작가가 대기실의 문을 열고 들어와 아내를 찾았다.

‘이제 녹화가 시작되니 나오세요.’

심호흡을 크게 한번 내뱉은 아내는 지켜보는 수많은 방송 스텝들과 카메라를 지나, 유재석과 조세호의 사이, 한가운데 비어있는 작은 의자로 향했다.


녹화 현장은 유쾌하고 활기찼다. 괜히 유느님, 유느님 하는 게 아니었다. 던지는 질문에 배려가 느껴졌고 답을 하는 아내의 표정은 편안했다. 이전까지의 방송에서는 녹화 후 편집된 결과를 보는 게 두려웠다. 사전에 약속되지 않은 질문에 답을 하는 건 괴로웠고, 그 모습을 방송으로 본다는 게 불편했다. 이번에는 달랐다. 질문을 받고 답변을 한다기보다는, 마음이 맞는 편한 사람들끼리 즐거운 대화를 나누는 느낌이었다. 이전 방송에서는 뻣뻣하던 손짓, 몸짓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 간간히 곁들이며 아내는 유재석과 조세호와의 대화를 즐겼다.


9월 29일 8시 40분, 방송이 시작되었다. 오프닝에 아내의 얼굴이 슬쩍 지나갔다.

‘나 화장 잘 받은 거 같지 않아?’

그런가. 그쪽은 내가 잘 모르는 분야이다. 아내의 순서는 세 번째였다. 평소보다 TV의 볼륨을 높여 놓았는데도 먼저 나온 출연자의 이야기가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첫 번째 출연자가 지나가고, 두 번째 출연자가 이야기를 마쳤다. 아내를 소개하는 준비된 영상이 나오고 이어서 아내의 모습이 화면에 나타났다. 방송의 세 번째 출연자인 아내가 화면 속에서 인사를 하고 가운데 작은 의자에 앉았다. 하지만 방송을 제대로 집중하며 볼 수는 없었다. 방송 내내 지인들의 연락으로 아내의 카톡이 쉬지 않고 울었다.



 


이전 09화 그냥 좋은 책을 만들고 싶은 거예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