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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현 Dec 02. 2021

어느 위인전의 인물보다도, 민현.

< 작당모의(作黨謨議) 11차 문제(文題) : 위인전 >

   민현을 처음 본건 그 아이가 아홉 살 때였던 걸로 기억한다. 요 며칠 계속되는 야근으로 몸이 꽤 지쳤다는 걸 느끼고 운동이라고 하기엔 민망하지만 조금은 걸어야겠다는 생각에 집 앞 길을 나선 터였다. 동네를 가로지르는 작은 천 위로 놓인 다리를 건너 한 초등학교를 지나다 잔디가 깔린 널찍한 운동장이 답답한 마음을 좀 풀어주지는 않을까 하여 학교 교문 안으로 들어섰다. 토요일이어서 학교 운동장엔 아이들의 흔적이 없이 조용했는데, 운동장 한편에 홀로 앉아 있는 한 아이가 눈에 띄었다.


   운동장을 둘러싼 키 높은 나무 그늘을 따라 돌면서 곁눈질로 슬쩍 그 아이를 쳐다보는데 아이는 나를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하던 일, 가끔 하늘을 바라본다던가, 혹은 어떤 생각에 빠진 듯 멍하니 한 곳을 응시할 뿐이었다. 운동장을 반 이상 돌아 아이가 있는 곳에 가까워졌을 때 멈춰 서고는 말을 건넸다.

   “이름이 뭐니?”

   낯선 사람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고개를 돌려 잠시 쳐다보던 아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민현이에요. 진짜 이름은 아니지만, 다들 그렇게 불러요.”

   “혼자 있니? 여기에서 뭐 하고 있는 거야? 심심하지 않니?”

   경계하지 않는 대답에 힘을 얻어 몇 가지 질문을 더 던지며 슬며시 아이의 옆에 흙을 털어내고 앉았다.

   “혼자여야 차분히 여러 가지 생각들을 할 수 있거든요. 아저씨는 혼자여서 심심해요?”

   아이의 말처럼, 30분가량을 혼자 걸으면서 심심함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처음 보는 아이에게 말을 건넸을지도.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물어봐도 될까?”

   “글쎄요. 그냥 아무 생각이나. 사실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중요하진 않아요.”

   아이가 하고 있던 생각이 꼭 궁금했던 건 아니어서 두리뭉실한 대답에 딱히 불만은 없었다. 기껏해야 쓸데없는 공상이나 좋아하는 같은 반 여자아이 생각이겠거니. 하지만 뒤에 이어진 아이의 한마디가 마음에 박혔다.

   “그게 무엇이든 내 생각을 한다는 자체가 좋은 거라서요.”


   아이와 짧은 인사를 하고 집으로 향하는데 여러 가지 생각이 밀려들었다. 내 생각을 해 본 게 얼마나 되었을까. 언젠가부터 주변 사람들과 하고 있는 일이 생각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모든 생각과 노력을 내가 아닌 것들에 쏟아붓고 있다는 걸 미처 깨닫지도 못한 채 몇 년을 살았다. 정작 누구의 보살핌도 받지 못해 지쳐있던 나를 스스로도 외면하고 방치했었다. 아이와 만났던 그날, 오랜만에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었다. 나의 어제, 나의 오늘, 나의 내일. 나를 중심에 두고 하는 생각들. 그 자체로 좋았다. 그 아이의 말처럼 그게 어떤 생각인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혼자의 생각이 필요하다 느껴지면 가끔 학교의 운동장을 찾았다. 그 아이가 있던 자리에 앉아서, 아이가 했던 것처럼 하늘을 바라보다가 멍하니 한 곳을 응시하면서 생각에 잠겼다. 한편으로는 아이를 한 번쯤은 더 만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했지만, 그날 이후로 그곳에서 아이를 만난 적은 없었다.




   민현을 다시 본건 몇 년이 지나고였다. 한껏 가벼이 높은 하늘과는 달리 바닥까지 내려앉은 무거운 마음을 달래러 학교 운동장에 앉아있는데 이번엔 아이가 먼저 나에게 말을 건넸다.

   “예전에 그 아저씨네. 맞죠? 잘 지내요?”

   몇 년 사이 키는 훌쩍 컸는데, 무표정한 모습이나 눈빛은 그때 그대로였다.

   “글쎄. 아저씨가 주변의 사람들 때문에 조금 힘들구나.”


   얼마 전 마음을 많이 썼던 친구 하나가 가시 돋친 말을 던졌고, 그 말이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마음을 헤집었는데 그 상처가 쉽게 아물지가 않았다. 그동안 노력한 배려들이 짓밟힌 것만 같아서 마음이 어지러웠다. 정작 상처를 주었던 그에겐 끝까지 웃음을 보였으면서, 익숙하고 편한 가족 앞에서는 날이 선 칼날이 숨겨지지 않았다. 상처가 가족에게로 번졌다. 정작 칼은 내가 들고 있으면서도,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가족을 원망했다. 가족이잖아. 이렇게 힘든데. 그 정도도 못 받아줘?


   “모두를 배려할 수는 없어요. 능력이 된다면 모를까.”

   나의 넋두리를 한참 듣고 있던 아이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아저씨가 할 수 있는 모든 배려는 아저씨의 가족들이 먼저예요. 그래도 부족할 거예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무시할 수는 없지 않겠니.”

   “그들은 아저씨와의 관계를 쉽게 무시하는걸요.”


   나 역시 가족이 최우선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렇게 살았다고 믿었다. 하지만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온기는 늘 밖으로 향했고, 돌아와 차갑게 식은 몸은 가족에게 기대어 데웠다. 가족은 차가워진 나를 아무 말 없이 품었다. 언젠가부터인지 그게 당연한 거라고 여겼다. 그 편이 익숙하고 편했다. 점차 가족의 최우선은 나여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가족이니까 늘 내 마음을 돌봐야 한다고 여겼다. 정작 난 그렇게 하지도 않은 채 말이다.

   “살아가는 데에는 몇 명의 소중한 사람만으로 충분해요.”

    그러고는 부끄러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한마디를 더 보탰다.

   “힘내요. 제가 응원할게요.”




   핸드폰으로 포털사이트를 돌아다니다 들어간 브런치에서 민현이라는 필명으로 글을 쓰는 사람을 우연히 보고는, 자신의 이름이 민현이라 했던 아이가 떠올랐다. 치열하게만 살았던 당시의 나를 한 걸음 떨어져서 바라보게 했던 그 아이의 말들은 어릴 적 읽었던 어느 위인전의 인물보다도 내게 큰 영향을 주었다. 내게 있어서 만큼은, 손에 잡히지 않는 책 속의 위인들보다 그 아이가 더 위인에 가까웠다. 브런치의 그의 글을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민현이라는 사람은 이른 은퇴 이후, 가족과 함께 하는 소박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의 삶에서 그 아이의 모습이 겹쳤다. 그 아이라면 지금 그처럼 살고 있지 않을까. 그러다 어쩌면 정말 그 아이 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글 하나를 골라 댓글창을 열어 혹시 어릴 적 학교 운동장에서 함께 이야기했던 아저씨를 기억하고 있는지를 물어보려다 애써 마음을 접었다. 그러고는 가벼운 인사말만을 하나 남겼다.

   ‘작가님의 삶을 저도 응원합니다.’




작당모의가 준비한 이번 문제文題는 위인전입니다. 누구에게나 존경하는 위인이 한 사람씩 있듯, 우리들도 그 누군가에게는 어쩌면 따라 하고 싶은 위인이지 않을까. 그래서 감히 작가들이 스스로 위인인 척 태연스러운 거짓말에 도전해보았습니다. 가벼운 웃음으로 격려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4인 4색, 결 다른 사람들이 글쓰기 위해 모였습니다.

제대로 한번 써보자는 모의이며, 함께 생각을 나누며 어울려 살자는 시도입니다.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매거진에 글로 작당 모의할 예정이니 지켜봐 주시길 바랍니다.

자, 그럼 수작(手作) 들어갑니다~, 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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