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작당모의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현 Aug 04. 2022

매체가 무엇이든 감동은 똑같다.

< 그 시절 그 문화: 영웅본색 >

   그러니까 말이야. 일단 내 말 좀 들어봐. <영웅본색> 알지? 주윤발, 장국영 나오는. 내가 <영웅본색>을 극장에서 본 게 아니거든. 물론 중학생이던 그때 <영웅본색>은 극장에서 절찬리에 상영이 되고 있었어. 극장 간판에는 이목구비가 조금은 어색하지만, 입에 성냥 개피를 야무지게도 물고 있어서 저게 주윤발이구나, 알 수 있는 영화 포스터가 그려져 있었고. 그래서 사자성어처럼 보이는 붉은색 한자가 <영웅본색>이라는 것도 바로 알 수 있었지. <영웅본색>은 고등학생 이상 관람가였어. 사람을 좀 많이 죽이는 영화였거든. 총으로 쏴서도 죽이고, 대검으로 베어서도 죽이고. 겉늙어 보이는 몇몇 녀석들은 극장 매표소 앞에서 목소리를 낮게 깔고 어설픈 늙음을 강조하면 운 좋게 표를 구하기도 했는데, 난 어림도 없었지. 안 믿기겠지만 그때 동안이었거든. 목소리도 청아하고 말이야. 하지 말라는 건 안 하는 모범생이기도 했고. 그렇다고 <영웅본색>을 보기 위해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었어. 동네 단골 비디오 가게에 가면 <영웅본색>을 구할 수가 있었거든.


   그 집은 겉으로 보기엔 여느 비디오 가게와 다를 바 없었어. 마흔 살은 되어 보이는 아저씨가 늘 카운터를 지키고 있었고. 그러고 보니 그 아저씨, 지금 나 보다도 어렸구나. 세상에나. 내가 나이를 이렇게나 먹어버렸네. 아무튼. 카운터 아래 서랍 안쪽에는 아저씨가 애지중지하는 사과박스가 하나 있었는데, 그게 보물상자였어. 그 안에는 극장에서 한창 상영 중인 영화들이 담겨 있었어. 가끔은 아직 개봉하지도 않은 영화들도 있었고. 그게 다가 아니라는 건 나중에 알았는데, 어느 날 머리숱이 좀 휑한 중년 아저씨가 카운터 앞에서 비디오 가게 아저씨와 쑥덕거리는 걸 슬쩍 들었어. 저기, 동양인 나오는 것도 있나? 일본애들 걸로, 하니까 아저씨는, 어제 막 들어온 게 있는데, 드릴까? 하면서 사과박스에서 비디오테이프를 하나 꺼내 건넸는데, 그게 아무래도 수상하더라고. 아마도 성인용 비디오가 아니었을까. 19금 애로영화? 아니 <애마부인> 같은 그런 준법적인 거 말고, 어둠의 경로로 들어온 성인용. 그러니까 야동 말이야. 나도 봤냐고? 아니 뭐, 궁금하긴 했는데, 중학생한테 그런 걸 빌려줄 정도로 아저씨가 막장은 아니더라고. 그 아저씨가 막장이 아니라는 걸 어떻게 알았냐고? 그러니까.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


   아무튼 난 <영웅본색>을 빌리러 비디오 가게에 간 거야. 아저씨, 지금 상영 중인 거 <영웅본색> 있죠? 그럼 아저씨는 그 보물상자 안의 검은 비닐봉지에서 비디오테이프를 뒤적이다가 하나를 꺼내. 비디오테이프에는 볼펜으로 <영웅본색>이라 대충 쓴 글씨가 휘갈겨져 있고. 비디오테이프를 건네는 아저씨의 눈빛은 비장하고, 그걸 받은 나의 표정도 덩달아 누아르가 돼. 말을 굳이 하지 않아도 눈빛으로 서로의 마음을 읽지. 어디 가서 비디오 얘기하면 안 되는 거 알지? 암요. 저도 이제 세상 돌아가는 거 어느 정도는 아는 중학생이랍니다.


   그땐 그랬어. 저작권이라는 말도 들어본 적이 없을 때이니. 당시에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를 그렇게 들었는데, 주말이면 '별밤 베스트 7'이라고, 한 주간의 인기곡을 소개하는 코너가 있었어. 매주 그 시간이 되면 긴장 모드야. 최신 음악이 내 것이 되는 시간이었거든. 카세트에 공테이프를 넣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다가 곡이 시작되면 동시에 녹음 버튼을 누르는 거지. 녹음되는 동안은 아무 소리도 허용되지 않아. 쥐 죽은 듯. 숨소리도, 심장 뛰는 소리도 작게. 그렇게 조심해도 베스트 7의 일곱 곡을 다 건지진 못해. 전주 나올 때 DJ가 멘트를 치기도 하고, 노래가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광고로 넘어가기도 하니까. 그런 것들을 솎아내면, 평균 두세 곡 건지는 거지. 다른 애들은 멘트가 있건, 광고가 나오건 상관없이 대충 듣던데, 내가 또 그런 쪽으로는 까탈스러워서.


   혹시 더블테크라고 들어봤나? 테이프를 넣는 곳이 나란히 두 개가 있는 카세트였는데, 그게 참 신세계였어. 한쪽에는 원본 테이프를, 다른 한쪽에는 공테이프를 넣고 플레이와 녹음 버튼을 동시에 누르면, 원본의 노래가 그대로 공테이프에 복사가 돼. 심지어 주변의 잡음도 없이. 원본 그대로. 나에게 그 더블데크 카세트가 있었거든. 평생 살면서 아쉬운 소리를 하는 건 주로 나였지, 남은 아니었는데 딱 그 한 시절, 더블데크가 나에게 있던 그 시절만큼은 남이 하는 아쉬운 소리를 참 많이도 들었더랬지. 이를테면 저기, 세상에서 가장 잘 생기고 멋진 친구야, 나 테이프 하나만 복사해 줄래? 같은.


   그렇게 들은 곡들이 지금의 나를 만든 거야. 이문세 <소녀>도 그렇게 들은 거잖아. 핸드폰 너머로 너에게 불러줬던 그 <소녀> 말이야. 라디오에서 나온 <소녀>를, 흩어져 사라지기 전에 조심스럽게 공테이프에 담은, 음질이 엉망인 곡이었지만 결국 나에게 남았고, 또 너에게도 남은.


   얘기가 조금 새긴 했는데, 아무튼 그때 비디오로 본 <영웅본색>은 아직도 내 기억에 생생하게 새겨져 있거든. 지금은 상상도 못 할 불법 복제 비디오테이프이긴 했지만, 어쨌든 영화가 정말 명작이라면 매체가 무엇이든지 간에, 극장 스크린이든, 불법 복제 비디오든, 주말의 명화든, 영화를 보고 받는 감동은 똑같지 않을까. 명작의 힘은 매체를 뚫고 나오는 무언가가 분명히 있으니까. 지금 내 기억의 <영웅본색>처럼. 명작이란 그런 거거든.




   이 타이밍에 이 얘기를 왜 하냐고? 아니, 그냥, 그렇다고. 아니, 그러니까, 극장 가기가 귀찮다는 게 아니라, <헤어질 결심> 나도 엄청 보고 싶어. 박찬욱, 칸에서 감독상 받았다면서. 박해일은 선하면서도 악한, 천상 배우지. <만추> 때부터 나 탕웨이 광팬이야. 그냥, 지금 이 순간, 갑자기 내 어릴 적 추억이 떠올라서 너와 공유하고 싶었던 거지. 그뿐이야. 응, 그러니까, 별 뜻 없어. 그래, 내 말이. 넷플릭스로 나올 때까지 언제 기다려. 보고 싶은 건 바로 봐야지. 롯데시네마? 좋지. 거기 쾌적하고. 내일? 그래 내일, 영화보기 딱 좋은 날씨겠네. 가자. 내일. 극장. 내 표정이 왜? 엄청 설레는 표정이잖아. 와, 엄청 기대된다. 근데 저기, 내일 극장 가면 혹시 팝콘은 사주나?





4인 4색, 결 다른 사람들이 글쓰기 위해 모였습니다.

제대로 한번 써보자는 모의이며, 함께 생각을 나누며 어울려 살자는 시도입니다.

격주 목요일 매거진에 글로 작당 모의할 예정이니 지켜봐 주시길 바랍니다.

자, 그럼 수작(手作) 들어갑니다~, 큐!

매거진의 이전글 유용(有用)과 무용(無用) 사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