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시절 그 음식: 쫄면 >
몇 살에 처음 쫄면을 먹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리고 아홉 살에 꽂힌 음식이 왜 하필 그 나이 또래가 좋아할 법한 바삭한 돈가스나 달달한 자장면이 아닌, 땀 좀 흘려야 먹을 수 있는 매운 쫄면이었는지는 나 역시 궁금하다. 하지만 가족과 떨어져 천 원짜리 한 장을 들고 분식집을 찾아가 4인 테이블에 혼자 앉아 쫄면을 먹었던 아홉 살의 그날만큼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그날은 가족 외식 날이었다. 며칠 전부터 돼지갈비를 먹으러 갈 거라고 듣긴 했었다. 나 또한 돼지갈비를 좋아했다. 외식을 하기로 한 날을 손꼽아 기다렸는데 막상 그날이 되자 변덕이 났다. 외출 준비를 하고 집을 나와서 돼지갈빗집으로 가는 길 내내 난 쫄면이 먹고 싶다고, 분식집을 가자고 떼를 썼다. 만약 분식집을 가자는 나의 뜻이 관철되지 않는다면, 고기는 몇 점만 깨작깨작 집어 먹을 거고 팍팍 좀 먹으라는 엄마의 말을 기다렸다가, 난 쫄면 먹고 싶다고, 하며 불만 가득한 표정을 내 보일 거라고 마음도 굳게 먹었다. 모처럼의 가족 외식 분위기가 망가지는 건 내 알바 아니었다. 난 고작 아홉 살이었으니까.
"혼자 가서 먹고 와."
아빠의 목소리는 덤덤했다. 짜증이 난 것도 아니고, 화가 난 것도 아닌 평소의 차분한 목소리였다. 지갑에서 천 원짜리 한 장을 꺼내 내 손에 쥐어주시고는 쫄면 다 먹거든 이곳으로 찾아오라고 하셨다. 엄마는 아무 말씀을 안 하셨고, 형은 잘 다녀오라고 내게 손을 흔들었다. 천 원짜리 한 장을 손에 든 채 돼지갈빗집 문 앞에서 머뭇거렸고, 아빠와 엄마와 형은 그런 나를 잠시 바라보다가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난 조금 당황했다. 혼자 가서 먹고 오라고? 난 고작 아홉 살이잖아. 원하던 쫄면을 먹게 되었는데도 마냥 좋아할 수가 없었다. 떼를 쓰는 방법은 분명 성공률이 저조했는데, 이번엔 너무나도 쉽게 성공해버렸다. 원하던 것을 이루어내었는데도 분식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느렸다. 한편으로는 버려진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분식집은 시내 번화가의 한가운데, 유동인구가 많은 곳에 위치한, 절대로 아홉 살짜리 어린애가 혼자는 가지 않을 식당이었다. 동네 분식점도 아닌 곳에 아홉 살짜리가 혼자 들어와 4인 테이블에 앉고는 쫄면 하나를 시키자 식당 아주머니는 잠시 머뭇거렸고, 쫄면을 테이블에 놓으면서도 이래도 되나 하는, 마치 어린애에게 몹쓸 짓을 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표정을 지었다. 주변 테이블의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사연이 있길래 꼬마애가 혼자 와서 쫄면을 먹고 있는 건지 궁금하다는 듯 나를 힐끔힐끔 쳐다봤다. 난 뭔가 큰 잘못을 한 사람처럼 주변의 눈치를 보며 쫄면을 먹어야 했다.
내 인생 최초의 혼밥이었던 그날의 쫄면 맛은 전혀 기억에 없다. 맵지는 않았는지, 혹 다 먹지 못하고 남기지는 않았는지 모르겠다. 단지 나를 쳐다보던 사람들의 눈빛과, 그 눈빛을 받으며 느꼈던, 아홉 살 나이로는 이해할 수 없었던 썩 좋지 않은 기분만이 기억에 선명하다.
세월의 깊이만큼 이제는 웬만한 일 정도는 웃어넘길 수 있는 온화한 분이 되셨지만, 당시 젊었던 엄마는 기분파였다. 그날의 기분에 따라 한없이 다정했다가도 한없이 무서워졌다. 전날에는 우리 아들 나물도 잘 먹는다고 엉덩이를 토닥토닥하시더니 하루가 지나서는 밥상머리에서 TV만 쳐다본다고 혼을 내셨다. 엄마에게 혼이 날 때엔 때때로 당황스럽기도 했는데, 그건 엄마의 꾸지람에는 일관성이 없기 때문이었다. 나이를 조금 더 먹어 눈치라는 것이 생기고 나서는 조금씩 엄마의 화를 피해 갈 수 있었는데, 저기압일 때의 엄마를 대하는 아빠의 처세술이 도움이 되었다. 엄마의 기분이 수상하다 느껴질 때면 아빠처럼 엄마의 눈앞에서 마치 없는 사람인 양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에 비해 아빠의 화를 예측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아빠는 단 한 가지 이유로만 화를 내셨다. 주말에 아무런 계획이 없다거나, 방학 때 집에서만 뒹굴거리면 어김없이 표정이 어두워지셨다. 아빠의 화를 피하려면 무엇이든 해야 했다. 그게 무엇이든 상관은 없었다. 만화가 보고 싶다고 하면 만화책을 사 주셨고, 게임을 하고 싶다고 하면 오락실을 데리고 가셨다.
아빠는 무모하기도 했다. 고양이를 키우고 싶다는, 생명을 키운다는 말의 무게를 모르는 어린아이의 철없는 바람을 아빠는 무시하지 않았다. 그다음 날 퇴근하신 아빠의 양손에는 노란 얼룩을 가진 새끼 고양이 한 마리가 들려 있었다. 온통 노란색 고양이 털 투성이인 아빠의 양복과 긁혀서 여기저기 빨간 선이 그어진 아빠의 손등이 그날 하루 종일 평온했던 엄마의 기분을 건드렸다. 긴말 안 해. 싸늘한 한마디를 남긴 엄마는 안방의 문을 쾅 닫았다. 그날 밤 내내 아빠와 나는 아무것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엄마의 눈치를 봤다. 엄마의 홀대가 서러웠는지 새끼 고양이는 밤이 새도록 애처롭게 울었다. 아빠는 다음날 털북숭이 고양이를 다시 안고 출근해야 했다.
아빠에게는 뭔가를 함부로 요구해서는 안됐다. 그게 무엇이든, 좋은 일이든 그렇지 않은 일이든 반드시 이루어졌다.
자라면서 아빠에게서 무언가를 하지 말라는 말은 단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 하겠다는 것 역시 단 한 번도 말린 적이 없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것만 아니라면 아빠는 언제나 내 편이었다. 그런 아빠에게 무언가를 하겠다는 것, 그러니까 가족 외식 날에 혼자 쫄면을 먹겠다고 떼를 쓰는 것은 아빠의 기분을 거스르는 행동이 아니었다. 손에 쥐어준 천 원짜리 한 장은 아홉 살 아들의 당당한 요구에 응답하는 아빠의 방식이었다.
아홉 살 혼밥의 경험은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망설임 없이 무슨 일이든 덤벼들고, 그게 잘못된 선택이었다고 느껴진다면 포기도 빠르다.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것들을 궁금해하다가 슬쩍 먼저 발을 담그고는 옆에서 걱정의 눈빛으로 머뭇거리는 아내를 꼬드긴다. 앞으로의 삶도 이전과 다를 것 같지는 않다. 항상 새로운 무언가를 하고, 한 곳에 머물지 않은 채 어딘가로 떠날 것이다. 그건 때때로 아홉 살의 혼밥처럼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어쩔 수 없다. 금새 털고 일어나 또 다른 무언가를, 어딘가를 찾을 것이 분명하다. 아빠가 나를 그렇게 키웠고, 내가 그렇게 자랐으니 말이다.
4인 4색, 결 다른 사람들이 글쓰기 위해 모였습니다.
제대로 한번 써보자는 모의이며, 함께 생각을 나누며 어울려 살자는 시도입니다.
격주 목요일 매거진에 글로 작당 모의할 예정이니 지켜봐 주시길 바랍니다.
자, 그럼 수작(手作) 들어갑니다~, 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