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를 하고 나를 가장 당황하게 했던 건 시간이었다. 열심히 무언가로 채우고 메워도 시간은 남았다. 이미 꽤나 잘라내어서, 그러느라 이제 조금은 지쳤는데도 내 앞에 늘어선 시간의 줄은 여전히 길었다. 하루 종일 비가 오는데 뭘 하지. 파란 하늘이 반짝이는데 뭘 하지. 배가 안 고픈데 뭘 하지. 아직 잠이 오지 않는데 뭘 하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뭐라 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시간을 버릴 수는 없었다. 안 심심해? 하루 종일 뭐해? 라고 누군가 물을 때, 얘기하자면 긴데, 그래도 들어볼래? 라며 이야기를 풀고 싶었다. 그러고 싶었다.
은퇴를 하기 전의 하루는 내가 계획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들이었다. 아침부터 해가 질 때까지의 시간을 회사가 담당했었다. 나의 하루는 퇴근 이후 잠들기까지 고작 서너 시간뿐이었다. 그게 불만이었다. 시간이 늘 부족하게만 느껴졌다. 나에게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기만 한다면, 그 시간을 잘 빚어서 뭐라도 만들어 낼 거라 생각했었다. 은퇴 후 누군가가 하루 종일 뭐 하냐고 물을 때 시간으로 만들어 낸 무언가를 줄줄이 내놓고 싶었다. 그런 생각이 조바심을 만들어냈다.
꽉 찬 시간표로 조바심을 억눌렀다. 하지만 빈틈없는 시간표에 맞춰 매일을 산다는 건 생각보다 금방 지치는 일이었다. 시간표의 간격이 조금씩 벌어졌다. 하려던 것들을 미루고 외면하면서 시간표는 점차 엉성해졌고 하루가 스펀지처럼 가벼워졌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온전히 내가 책임지고 소화해내야 하는 시간에 겁을 먹었다. 정년 퇴임한 나이 든 가장이 갑자기 넘쳐나는 시간과 함께 무기력해진다던데 한 달 만에 내가 딱 그 꼴이었다.
방콕의 낮은 뜨겁다. 햇볕은 묵직하고 공기는 눅눅하다. 처음 방콕에 왔던 20대 때에는 그 방콕의 한낮을 잘도 누비고 다녔다. 저녁이 되면 꽤 지치긴 했지만 다음날이면 바로 회복되었다. 40대의 방콕은 다르다. 한낮의 뜨거움은 피해야 한다. 괜히 싸움을 걸었다가 얻는 것 이상으로 많은 것을 잃는다. 40대의 체력은 회복되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간단히 이른 점심을 먹고, 숙소에서 걸어서 10분 정도 떨어져 있는 코워킹 스페이스로 갔다. 해가 서쪽의 건물들 위로 넘어가는 늦은 오후 무렵까지 시간을 보낼 곳이다.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유튜브를 보거나, 멍을 때리거나 하기에 좋다. 방콕의 더위를 피해 시간을 보내기에 최적의 공간이다. 디지털 노마드들이 많이 생겨서인지 방콕에도 이곳저곳 코워킹 스페이스가 많다. 맛없는 커피와 손이 잘 안 가는 스낵과 속 시원하게 빠른 와이파이가 있는 곳이다. 스타벅스보다는 조용하고, 스터디 카페보다는 자유로운 이곳이 250밧이면 하루 온전히 내 사무실이 된다. 마침 이곳의 이름도 더 컴퍼니다. 여러 날을 한 번에 결제하면 할인도 해준다.
평일인데도 사람이 별로 없다. 저 멀리 테이블에 일본인과, 내 뒤 테이블에 서양인, 그리고 구석 한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는 태국인 몇 명이 전부다. 한데 모여서 회의 비슷한 것도 하는 걸 보면 아직 사무실을 얻지 못한 스타트업 회사의 직원들이 아닐까 싶다. 책을 읽다가, 글 조금 쓰다가, 창 밖 구경도 하다가, 헤드셋을 쓰고 영어 강의도 좀 듣는다. 바쁘게 일하는 것처럼 보이는 다른 사람들 옆에서 내 한낮의 시간을 맘껏 뿌린다.
주말이면 다른 곳을 찾는다. 더 컴퍼니는 이름 때문인지 토요일, 일요일에는 문을 닫았다. 트루 스페이스는 주말에도 문을 여는데, 주말이어서인지 정말 사람이 없다. 이 공간에 나 외에는 두 명뿐이다. 카운터를 지키는 사람과 학생으로 보이는 어린 친구. 이곳은 기본 3시간에 100밧이고, 추가되는 한 시간마다 40밧이 더 붙는다. 내가 머물렀던 3시간 동안 드나드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다는 건 3시간 동안 고작 200밧을 벌었다는 이야기인데, 여기 망하면 어떡하지.
숙소의 36층도 마음에 드는 공간이다. 비즈니스룸이라는 이름의 공간인데, 나 외에는 이곳을 찾는 사람이 없다. 이 숙소 건물의 사람들은 비즈니스엔 영 관심이 없는 듯하다. 덕분에 마음껏 이곳을 누린다. 갈 때마다 세게 틀어져 있는 에어컨도 눈치 보지 않고 꺼버린다.
여전히 시간은 버겁다. 많은 시간들이 쓰이지 않고 버려진다. 달라진 게 있다면 새어나가는 시간을 애써 붙잡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루 종일 뭐 하냐는 질문은 아직도 대답을 하기에 조금 불편하고, 나의 하루를 이야기해 주는 데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전처럼 조바심을 내지는 않는다. 시간으로 만들어 낸 무언가가 보이지 않고, 하루하루가 스펀지처럼 가벼워도 그게 뭐 어때서, 그럴 수도 있는 거지, 하고 넘긴다.
그런 하루여도 괜찮은 건지 아직은 모르겠다. 하루를 잘게 쪼개어 바쁘게 사는 사람들을 보면 나의 하루가 딱하기도 하고, 삶에 휘둘려 하루하루가 고달픈 사람들 앞에서는 나의 하루가 부끄럽기도 하다. 어떨 땐 딱하기도, 한편으론 부끄럽기도 한 나의 하루는 정말 괜찮은 건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다만 방콕에까지 와서 한국에서와 별 다를 것 없는 하루를 보내는 걸 보면서 내 보잘것없는 하루가 전보다는 친근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