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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현 Oct 07. 2023

알프스의 하늘은

   여행을 떠나면서 날씨 운을 빌어본 적이 있었던가. 덥지도 춥지도 않으면서 하늘은 파랗고, 너무 파랗기만 하면 심심하니 뭉게구름 한 두 조각쯤 하늘에 떠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 이왕이면 그 계절의 꽃내음 뭍은 바람도 살랑살랑 불어온다면 완벽할 텐데 하는 소망 말이다. 돌이켜보면 여행을 떠나기 전 가장 많은 기대를 했던 건 단연 그곳의 먹거리였다. 부산이라면 돼지국밥과 밀면이고, 통영에서는 도다리쑥국에 멍게비빔밥. 입맛 돋는 막국수가 생각난다면 오징어순대도 함께 먹을 수 있는 속초. 늘 이런 식이었다.


   보스니아 내전의 슬픈 역사는 보스니아에 도착하고 나서야 관심이 생겼고, 기울어진 피사의 사탑이나 거대한 피렌체 대성당의 돔도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시큰둥했었다. 우선순위에서 역사와 문화, 예술 따위는 늘 그곳의 먹거리에 밀렸다. 나에게 보스니아는 체바피의 나라였고, 이탈리아는 파스타의 나라였다. 그러니 보스니아에 비바람이 퍼붓든 이탈리아에 눈보라가 몰아치든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체바피와 파스타는 날씨와 상관없이 즐길 수 있으니.


   그랬던 내가 여행 내내 하루에도 몇 번씩 날씨 앱을 열었다. 그건 로마나 피렌체, 베로나의 오늘 날씨를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오로지 유럽 여행의 마지막 일정인 오르티세이의 날씨 때문이었다. 오르티세이의 일정이 다가올수록 더욱 자주 날씨 앱을 열었다. 날짜별로 표시된 구름을 보며 제발 이 구름이 없어지기를 빌었다. 안 없어져도 좋으니 비로만 바뀌지 않기를 빌었다. 유명하다는 이탈리아의 오래된 성당에 들를 때마다 1유로를 내고 산 촛불을 올리며 성모마리아님과 예수님의 평안을 빌었다. 혹시 기분 나쁘셔서 이곳에 폭풍우를 내리친다 하셔도 괜찮으니 제가 오르티세이에 있을 때만은 기분 푸시기를. 부디 심기가 편해지시기를.




   오르티세이는 이탈리아 북부에 위치한 작은 도시이다. 알프스 산맥의 일부인 이탈리아 북부 돌로미티 지역은 알프스의 숨 막히는 산악 경관을 자랑하는데, 오르티세이가 돌로미티 지역의 베이스캠프 역할을 한다. 오르티세이 중심부에는 리프트와 곤돌라가 알프스 산맥을 향해 가지처럼 뻗어있는데, 겨울 시즌이면 스키를 타려는 사람들을 실어 나르고, 눈 대신 야생화가 뒤덮이는 여름 시즌에는 트레킹에 나선 사람들을 알프스의 한가운데로 데려다준다. 스키도, 트레킹도 하기 힘든 봄 시즌에는 리프트와 곤돌라 운행을 하지 않는다.


돌로미티 세체다


   여름의 시작, 잠들어 있던 리프트와 곤돌라가 다시 운행을 시작하는 6월 중순, 7박 8일의 일정으로 오르티세이에 숙소를 예약했다. 오르티세이의 먹거리가 궁금해서는 당연히 아니고, 오로지 알프스의 웅장한 자연을 느껴보기 위함이었다. 알프스는... 마리아와 일곱 남매가 도레미송을 부르며 뛰어다니고(물론 오스트리아 쪽 알프스이지만.) 알프스 소녀 하이디가 꿈을 키우며 자라난 곳 아니던가.(물론 스위스 쪽 알프스이지만.) 도레미송과 하이디가 아니더라도 수많은 영화에서, 세계 테마 기행에서, 걸어서 세계 속으로에서, 달력 사진에서, 사람들의 블로그에서, 인스타그램에서 볼 때마다 숨이 멎던, 죽기 전에는 꼭 한번 가보고 싶다는 마음을 들게 하던 곳 아니던가.


   7박 8일 오르티세이 일정 전체를 돌로미티 지역의 유명하다는 트레킹 코스를 돌아보는 것으로 채웠다. 아침 9시, 그날의 첫 곤돌라를 타고 해발 2,000미터가 넘는 알프스 산맥의 한가운데에 오르고 지도와 표지판이 알려주는 트레킹 코스를 하루 종일 걷다가 오후 5시, 그날의 마지막 곤돌라를 타고 내려오는 일정으로 7박 8일을 계획했으니 무엇보다 중요한 건 바로 날씨였다. 비가 내려 그날 하루를 허무하게 날리게 되는 상상도 하기 싫은 일이 제발 일어나지 않도록 어딘가에든 누구에게든 빌어야 했다. 성모마리아님, 예수님, 기분 푸시기를. 부디 심기가 편하시기를.




   열흘간 머물렀던 베로나를 떠나 오르티세이로 가는 날, 날씨 앱에서 온통 구름뿐이던 오르티세이의 7박 8일에 드문드문 해가 보였다. 아직은 얼굴 절반을 구름에 숨긴 수줍음 많은 해였지만 구름 사이로 빼꼼 내민 얼굴이 반가웠다. 버스를 타고 베로나 역으로, 기차를 타고 볼차노 역으로, 다시 버스를 타고 오르티세이로 가는 동안 목이 아플 만큼 하늘을 봤다. 성모마리아님과 예수님이 어딘가에서 지켜보고 있을 것만 같은 하늘을 봤다.  


   나의 기도가 하늘에 닿았는지 오르티세이에 가까워질수록 구름은 점차 사라졌다. 구름이 내어준 하늘을 며칠 동안 내내 수줍음뿐이던 해가 차지했다. 해는 수줍음을 떨어내고 하늘 한가운데에서 당당했다. 홀로 우뚝 선 당당함이 며칠은 갈 기세다.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야생화 내음이 뭍은 살랑바람이 버스 창 사이로 흘러 들어오고 고개 들어 보이는 알프스의 하늘은 눈이 부시게 청명했다.




이번 매거진은 idle​ 님과 함께 꾸려 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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