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에 온 지 한 달이 지나자 익숙한 얼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말 한번 나누어보지 않았고, 어쩌면 상대는 나의 존재조차 모를 수 있지만 나에게는 낯익은 친구들이 하나 둘 늘어갔다. 옷차림이 화려하거나 머리스타일이 독특해 첫눈에 기억해 버린 친구들이 있었는가 하면, 수십 번을 지나치면서 나도 모르게 저절로 눈에 익어버린 친구들도 있었다. 내 또래로 보였던 JT는 전자이면서 후자였다.
JT는 이 더운 필리핀에 있으면서도 늘 야구모자에 운동화 차림이었다. JT가 내 눈에 들어온 이후에 세어 본 그의 야구모자는 3개 이상이었고, 밝은 옷을 입었을 때는 검은색 운동화를, 어두운 옷을 입을 때면 흰 운동화를 신었다. 평일 저녁이면 사람들을 모아 밖으로 나갔고, 주말이면 한국에서 직접 둘러업고 왔다는 골프채를 메고 골프를 치러 나갔다. JT의 주변에는 늘 사람들이 많았다. 나이도 국적도 제각각인 친구들이 JT를 볼 때면 그냥 지나치지 않고 반갑게 인사를 했다. JT옆에는 활발한 JT와는 달리 말 수가 적고, 키가 크고, 옷차림이 튀지 않는, 나보다 두어 살 정도 어려 보이는 한국인 친구가 늘 함께였는데, 그렇게 서로 잘 어울리지는 않았던 2인조는 이삼십 대 친구들 사이에서도 확 눈에 띄었고 또 자주 보였다.
6주가 지났을 때 즈음, JT와 늘 함께 다니던 한국인 친구가 먼저 졸업을 했다. 옆을 지키던 친구가 한국으로 돌아가버리고 혼자가 된 JT는 그럼에도 꿋꿋이 나이도 국적도 제각각인 친구들과 잘 어울려 다녔다. 그러던 JT가 어느 날 저녁 뜬금없이 내게 말을 걸었다.
“왜 늘 혼자 다녀요?”
나를 알고 있었나? 하긴 학원에 몇 안 되는 한국인 중년 아저씨이니 눈에 띄긴 했겠지, 그나저나 질문이 이렇게 훅 들어오나? 내가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느라 머뭇거리자 JT는 내 답변을 기다리지 않고 말했다.
“나가서 맥주 한잔 하시죠.”
서로 나이가 같다는 걸 안 JT는 바로 말을 놓았다. 주문한 파닭과 맥주 두병을 앞에 두고 JT는 자기 얘기를 먼저 꺼냈다. 보험회사에 다니다 나와서 건강식품을 판매하는 회사를 작게 차렸는데 그게 잘 안 되어서 쉬고 있다고, 앞으로는 베트남에 있는 아는 형님과 함께 일하기로 했다며 묻지 않은 이야기를 길게 이었다. 베트남에서 일해야 하니 영어가 필요했고, 그 형님이 이곳을 추천해서 왔다고, 졸업하면 한국에서 2주 정도 머물다 베트남으로 갈 거라고 했다. 결혼은 아직 안 했으며, 베트남에서 일하다 참한 베트남 여자를 만난다면 고민 없이 결혼할 거라고 했다. 역시나 먼저 묻지 않은 말이었다. 말하는 동안 비어버린 맥주를 한 병 더 시키며 JT는 나를 보며 말했다.
“내 이야기는 됐고, 이제 너 이야기를 좀 해 봐.”
음? 또 이렇게 훅 들어오다니.
JT는 이후에도 나를 곧잘 불러냈다. 자신을 가르치는 필리핀 강사와 저녁을 먹기로 했다며 부르고, 수업을 같이 듣는 대만 친구가 이번주 졸업이어서 술 한잔 하기로 했다며 부르고, 별다른 이유가 없을 때엔 내가 안 부르면 너 또 혼자 있을 거잖아, 하면서 불렀다. 내가 아니어도 함께 어울릴 친구들이 많은데도, 내가 없더라도 별 상관없을 술자리인데도 JT는 빼놓지 않고 나를 불러냈다.
JT를 만나면서 베트남에서 치과를 하고 있다는 응우옌도 알게 되고, 싱가포르에서 카지노 딜러로 일하고 있다는 웨이도 알게 되었다. 대만에서 가장 오래된 식당을 운영하는 할아버지를 두었다는 위메이는 대만에 온다면 꼭 할아버지의 식당에 초대를 하겠다고 했고, 후지산 정상도 올라갈 수 있냐는 질문에 마코토는 일본에 와서 연락하면 후지산 정상까지 직접 가이드를 하겠다고 했다. JT가 아니었다면 모두 그냥 모른 채 스쳐 지나갔을 인연이었다.
JT는 나보다 졸업이 4주 빨랐다. 졸업을 며칠 앞두고 자리한 술자리에서, 4주나 여기에 더 갇혀 있어야 하냐? 내가 없다고 외로워서 밤마다 우는 거 아니냐? 하며 실없는 농담을 하던 JT는 자기 없이 보내게 될 내 4주의 시간을 걱정했다. 사람들에게 먼저 말도 좀 걸고 그러라고, 먼저 말만 걸면 다 친해진다고, 말 걸었는데 상대가 시큰둥하면 다른 사람 또 찾으면 된다고. 그러면서, 이제 끝이니까 하는 말인데, 하며 처음 내게 말을 걸었던 그때를 끄집어냈다.
“매일 혼자 다니는 모습이 어찌나 안쓰럽던지. 내 마음이 다 아프더라고.”
아니, 이 녀석은 갈 때까지도 훅 들어오는구나.
JT가 졸업한 이후로도 JT의 바람과는 달리 내가 먼저 사람들에게 말을 거는 일은 없었다. 어쩌면 JT도 사람들에게 내가 먼저 다가가는 일은 없을 거란 걸 처음부터 알았을 것이다. 사람의 성향은 모두 다르고 또 그건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걸 이제는 아는 나이니까. 아는 형님이 일하고 있다는 베트남에는 잘 도착했는지 모르겠다. JT라면 그곳에서도 사람들에게 먼저 말 걸고 사람들이 견제하기도 전에 안으로 훅 들어가고 할 테니, 걱정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