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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현 Jul 19. 2024

성적 그 까짓게 뭐라고

   3개월 동안 이곳에 머무르는 동안 총 4번의 레벨테스트를 치러야 한다. 입학할 때의 레벨테스트는 실력에 맞는 수업을 배정받기 위해서, 그리고 4주가 지날 때마다의 레벨테스트는 4주간의 실력 향상을 확인하기 위함이다. 레벨테스트는 4개 영역, 듣기, 읽기, 쓰기, 말하기로 나뉘고 각각 200점이 만점이다. 테스트를 치르는데 세 시간 정도가 소요되고, 결과는 2~3일 정도 후에 점수와 순위가 매겨진 채로 모두가 볼 수 있는 게시판에 붙는다.  


   듣기와 읽기는 우리나라의 수능시험과 비슷하고 쓰기는 주어진 주제를 제한된 단어 수 이내로 써내면 된다. 말하기가 가장 긴장이 되는 시간인데 시험관을 앞에 두고 2인 1조로 치러진다. 녹음기가 켜진 채로 간단한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하고 주어진 사진을 보며 사진 속의 내용을 설명하고, 특정한 상황을 가정하여 파트너와 대화를 나누면 앞에서 지루하게 듣고 있던 시험관이 각각의 점수를 매긴다.


   첫 레벨테스트 때, 나의 말하기 파트너는 일본인이었다. 말하기 테스트를 치를 작은 강의실로 그와 함께 들어가면서 내 말하기 파트너가 일본인이라는 것에 살짝 안심이 되었다. 일본인은 영어를 못하지 않던가. 그들은 맥도널드를 마쿠도나루도라고, 커피를 코히라고 발음하지 않던가. 하지만 시험관의 첫 질문에 그가 능숙한 영어로 답하는 걸 들으면서 부족한 내 영어실력이 그가 내뱉을 엉터리 발음에 묻힐 수도 있겠다는 기대는 허망하게 부서졌다.


   그는 쉬운 말을 쉽게 했다. 들으면 알지만, 막상 입에서는 맴돌던 말들을 그는 참 쉽게도 했다. 그는 이기리시를 잉글리시라고, 와루도를 월드라고 정확히 발음했다. 숨 막히는 좁은 강의실과 무심한 시험관의 눈빛과 긴장해 굳어버린 머리와 믿었던 파트너의 배신은 가뜩이나 얼어있던 내 입을 완전히 봉해버렸다.


   3일 후 건네받은 성적표에 적힌 나의 영어 레벨은 Novice 2 였다. 내 아래로 Novice 1, 생초보 레벨 하나가 있고, 내 위로는 자그마치 아홉 단계나 되는 레벨이 나를 내려 보고 있었다. 각 영역 중에서 말하기 점수가 가장 낮을 거라 생각했는데 웬걸, 쓰기 점수가 가장 끔찍했다. 최하 레벨이었다. 쓰기가 말하기보다는 좀 더 자신이 있었는데. Rose 가 괜히 내 글을 mess 라고 했던 게 아니었구나.




   4주가 지나고 다시 치른 두 번째 레벨테스트의 결과를 기다릴 땐 내심 레벨이 한 단계는 올라가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했다. 늦은 나이에 낯선 공부 하느라 머리가 어지러워도, 그래서 어쩌다 수업 한 두 개 정도는 결석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유혹에도 꿋꿋이 강의실을 향하지 않았던가. 주말이면 놀러 나가는 어린 학생들을 부러워하면서도 이 나이에 무슨, 하며 늘 도서관으로 향하지 않았던가. 마침 레벨테스트에서 만난 말하기 파트너는 이전의 나처럼 어리바리하지 않았던가. 무엇보다도 4주간 Rose 의 혹독한 시간을 견디어 내지 않았던가.


   1층 오피스에서 담당자로부터 두 번째 레벨테스트 성적표를 건네받았을 때 올라가는 입꼬리를 붙잡느라 애를 써야 했다. 첫 테스트에서 최하 레벨이었던 쓰기가 네 단계나 위로 올라 있었다. 가장 낮았던 쓰기 점수가 이번엔 네 영역 중 가장 높았다. 최종 레벨은 전보다 두 단계 올랐다. 이깟 점수 조금 오른 게 뭐라고 자꾸 웃음이 새어 나와서 몇 번이나 광대를 쓸어내려야 했다. 지나고 보니 성적, 등수 그거 별거 아니더라, 나중에 사는 데 별 지장 없더라, 내가 몇 등 했었는지, 점수가 몇 점이었는지 이젠 기억도 나지 않더라, 하며 고등학생 조카에게 위로라고 했던 말들은 다 위선이었구나.


   이곳에 온 지 4주 만에 처음으로 11교시, 쓰기 담당 강사인 Rose 의 수업이 기다려졌다. 성적표를 Rose 눈앞에 디밀며, 이것 봐, 쓰기 레벨이 4단계나 올랐어, 네가 생각해도 대단하지 않아? 몰랐겠지만 내가 이런 사람이야, 어디 한 번 더 내 글을 mess 라고 해 보시던가, 하면 깜짝 놀란 Rose 가 어이쿠 제가 몰라 뵈었습니다, mess 라니요, 미처 못 알아본 제 눈이 mess 겠죠, 하는 유치한 상상이 계속 떠올랐다. 성적은 나중에 사는 데엔 지장 없을지 몰라도, 당장은, 지금은, 오늘은 절대로 별거 아닌 게 아니었다.


   11교시 수업이 시작되자마자 내가 내민 성적표를 본 Rose 는 Rose 답게 딱 한마디만 했다.

   “Good.”

   그러곤 Rose 는 화이트보드에 질문 하나를 적었다.

   “너의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선택은 뭐였어? 답변 준비하는데 5분 줄게. “

   수업은 여느 때와 다를 것이 없었다. 답변을 준비하는 5분은 짧았고, 준비한 답변은 여전히 어눌했고, 중간중간 Rose 는 Why? 라고 되물으며 나의 어눌한 답변을 계속 늘렸다. 하지만 이전처럼 수업이 마냥 힘들지만은 않았다. 4주 내내 단 한 번 웃지 않던 Rose 가 내 성적표를 보고 Good 이라고 말할 때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것을 똑똑히 보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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